"작가가 되고 싶어요. 작가님이 부러워요." 동시 쓰기 수업을 마칠 때쯤, 한 초등학생이 말했다. 응원하지 못했다. 천천히 다시 생각해보라고 말할 뻔했다. 얼마 전 함께 사는 어린이-반려자가 말했다. "아빠같이 글 쓰는 작가가 될래." 환호하지 못했다. 작가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할 뻔했다. 북토크 질의응답 시간, 한 청소년이 질문했다. "작가로 사는 건 어떤가요?" 어, 그게, 그러니까, 2021년 문체부 예술인실태조사에서 예술인 개인 수입 중 예술 활동 평균 수입은 695만 원예요. 한 달이 아니고, 연봉을 말하는 거예요. 또, 남성은 832만 원이지만, 여성은 570만 원입니다. 여성이라면 굳이 남다른 각오를 필요하게 하죠? 참고로, 수입이 아예 없는 경우도 전체 43% 정도 돼요. 예술 활동 관련 스트레스 요인 중 압도적 1위(74.5%)는 '낮은 보수'를 꼽았어요. 자, 그럼 피할 수 있다면 피해 보는 건 어떨까요? 라고 말할 뻔했다. 이미 분량이 넘치는 도전, 희망, 극복의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원고지 1매 분량만큼이라도 다르게 응답할 가능성이 필요했다. 그러다, 우연히 작가노조(준비위원회) 출범을 위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여기다. 일단 가보자.
2024년 6월 26일, 서울국제도서전이 개막한 날. 작가노조 준비위원회의 '작가노동자 선언 기자회견'이 강남 코엑스에서 열렸다. 열 명 조금 넘는 소설가, 시인, 에세이스트, 장르 작가, 스토리 작가, 칼럼니스트들이 '글쓰기도 노동이다' 피켓을 들고 작가노동자라는 이름의 대오를 이루었다. 행사 관계자는 얼마 동안 진행할 거냐, 대표자가 누구냐, 피켓은 총 몇 개나 있냐, 총 몇 명이 모일 거냐, 쉼 없이 묻고 증빙 사진을 찍었다. '단결금지법'이 있던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단결'은 여전히 관리인들에게 거슬리는 일이었다.
기자회견은 시작되었다. 나는 텅 빈 원고지 피켓을 번쩍 들고 있는 원고지 1매 분량의 역할을 맡았다. 전날 밤 마감했던 원고지 매당 5,000원 하는 40매 분량 원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이크가 켜지고 "글 쓰는 일은 우리 정체성의 일부이자 우리가 삶을 이어 나가는 하나의 수단"(작가노동자 W)으로 삼은 작가 노동자들이 발언을 시작했다.
"글쓰기 노동을 흔히 각자의 작업실, 각자의 책상을 기반으로 한 프리랜서 노동이자 독립적 노동이라 여기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한국 사회에서 사실상 글쓰기 노동은 불안정 노동, 하청 노동, 종속적 노동이다."(작가노동자 R) 맞다. 정확했다. 나도 그랬다.
나는 작가가 될 결심이었다. 청소년 시기 내내 '장래 희망' 칸에는 시인, 평론가, 번역가, 에세이스트, 작가를 번갈아 썼다. 작가는 오래된 나의 열망이었다. 가난한 내가 작가를 꿈꾸며 글로 할 수 있는 비정기-비정규-비계약-비보험 노동을 쉼 없이 했다. 인터뷰 속기록, 교정 교열, 제품설명서 번역, 광고 문구 작성, 자서전 대필, 자기소개서 대필, 회사 사보…. 계약서를 쓰지 않고 일하다 보니, 원고료를 못 받는 일들도 제법 있었다. 원고료 정산은 언제가 '제때'인 줄 몰랐고, '때'가 지난 것 같아 연락하면 "작가가 되겠다는 젊은 놈이 돈만 밝힌다"라고 했다. 자본과 노동이 만나는 곳이었지만 질서가 없었다.
함께 하청 문필노동을 하던 작가 지망 여성 동료들은 성적 괴롭힘에 자주 시달렸다. 화장실에서 혼자 울고 나온 여성 동료들은 점점 욕이 거칠어져 갔다. 혼자 싸우다 소리 없이 사라지거나, 싸우느라 기력을 다해 작가를 향한 열망을 접었다. 우리는 폭력 앞에서 너무나 취약했고, 세계는 고약했다. 미세한 사건·사고들이 절망을 조금씩 쌓았다.
우리에게도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가 있다거나, 차별과 불이익을 호소할 창구가 있다고 들어본 적 없었다. 모든 게 개인이 책임지고, 끼리끼리 욕하면서 풀어야 하는 사적인 이야기일 뿐. "각자의 작업실, 각자의 책상에서 자신의 살길을 자기 혼자 찾아"(작가노동자 I)가야 했다. 숨이 가빴다.
발언은 이어졌다. "언젠가 스타 작가가 되리라는 낙관에 몰두하면서 다른 이들을 시기하는 스스로가 역하면서도, 그런 미친 감정이라도 붙잡지 않으면 이 현실을 어떻게 마주할지 모르겠는 일들, 그래서 결국 나를 싫어하거나 글을 미워하는 감정에 연루되는 일이기도 합니다."(작가노동자 T) 맞다. 나도 그랬다. 주변 작가 지망생 친구들 모두 그랬다.
동료 중 몇몇이 등단이라는 간판을 달던 사이. 그럴듯한 책으로 데뷔하던 사이. 작가 지망생 동료 중 좁은 관문을 통과하지 못한 채, 자신의 재능 없음에 낙담하다, 끝내 글쓰기를 증오하다, 활자에 냉소하며 창작 활동을 접었다. 나도 그중 하나였다. 실패한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상위 0.1% 유명 작가가 아니면, 생존 자체가 초라해지는 '셀럽 경제' 안에서 능력주의는 자기 무능감과 좌절을 재생산했다. "억울하면 성공하던가”라는 비아냥은 "억울하면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던가"로 이어졌다. 사회 구석 구석까지 오디션 세트장 설치를 마친 신자유주의 격언, '네가 죽어야 내가 산다'는 문장은 박진감 넘치게 실감 났다. 숨이 막혔다.
발언은 계속되었다. "작가들은 과로상태다. 근골격계 질환은 당연지사, 몸과 마음의 건강을 위협하는 문제들과 싸운다"(작가노동자 E)라는 발언과 "혼자 골방에서 일하는 사람은 소리소문없이, 그리고 자각도 없이 다치기 일쑤다.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렇다"(작가노동자 R)라는 발언을 들었을 때. 맞다. 딱 맞다. 나도 그렇다. 나의 다정한 주변 작가 친구들도 모두가 그렇다.
책 '두 번째 페미니스트'(아르떼, 2019) 출간 이후 "안녕하세요. 작가님"으로 시작하는 이메일과 문자, 전화와 만남이 늘었다. 곳곳에서 나를 불러세웠다. 내 글을 지면에 싣고자 했고, 내 말을 무대로 불러 세워 듣고자 하는 곳이 생기면서 각종 강의, 북토크, 글쓰기 워크숍들이 이어졌다. 운이 좋았다. '작가님'으로 불리면서 써야 하는 원고들과 강의가 늘어나면서, 늘 조급했다.
가사노동의 목록은 길었고, 돌봄노동의 시간은 촘촘했다. 요리하던 중간중간 부엌에서 글을 쓰고, 기저귀 가방에 원고 뭉치를 넣어두고 틈틈이 퇴고하고, 빨래를 갠 뒤 원고를 마감했다. 밥 먹을 시간을 아끼고, 잠잘 시간을 아껴 써야 했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거나, 모두가 잠든 늦은 새벽에 원고를 쓰고,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근골격계 질환, 대사질환, 만성피로는 기본값처럼 주어졌다.
별다른 근거 없이 오직 관행으로만 이어지는 저렴한 원고료와 강의비를 받아 가며 아슬아슬하게라도 살아가려면 과로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은 일 하며 살면서 뭘 더 바라?'라지만, 과로해야 생계의 최저선을 간신히 지킬 수 있는 저렴한 노동을 지속하다 보면 '이게 왜 노동이 아닌 거지?' 말이 절로 튀어나왔다. 숨이 찼다.
작가들의 발언 모두 내 이야기와 겹쳤다. 다르게 응답할 말의 가능성은 ‘나’의 모습을 한 채 ‘나’의 곁에 대오를 이루고 있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각자의 노동을 향해 하나둘 흩어졌지만, 느슨한 신뢰를 나눠 가진 듯했다. 연루되어서 든든했다.
작가가 되고 싶다는 어린이 W를 향해, 첫 계약을 앞둔 신인 작가 R을 향해, 돈만 아는 세계가 낯설고 어려운 청년 작가 I를 향해, 성폭력과 성차별이 구조화된 가부장제 사회와 싸우며 쓰고 있는 여성 작가 T를 향해, 일상적 혐오를 견디며 투병 중인 퀴어 작가 E를 향해, 뒷바라지해줄 자원이 없는 빈곤 작가 R을 향해, 비장애중심사회에 책 한 권 읽는 것조차 버거운 장애인 작가 S를 향해 응답할 수 있는 말을 얻은 듯했다.
꿈꿀 수 있는 권리, 불공정 계약을 강요받지 않을 권리, 집필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을 권리, 안전하게 노동할 권리, 건강하게 노동할 권리, 사회보장권리로 4대 보험을 누릴 권리, 평등하게 정보에 접근할 권리가 있다고 응답할 수 있는 작가노조가 지금, 바로 필요하다. "작가로 먹고 살 생각은 하지 마라"는 말이 아니라 다르게 응답할 가능성이 지금, 바로 필요하다. 작가노조 깃발이 써 내려갈 권리의 목록들이 "작가로 살고 싶다"는 열망을 품은 사람들을 향해 원고지 n매 분량의 가능성을 발명할 것이라고 믿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