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 카뮈(1913~1960)는 종군기자로 참여한 스페인내전에 대한 논픽션 ‘자유 스페인(L’Espagne Libre, 1946)’ 서문에 아릿한 한 문장을 남겼다. “우리 시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슴속에 스페인을 품고 있다.”
그는 2차대전 유럽 전쟁이 끝나가던 45년 저 글을 썼다. “(그렇게 스페인을 가슴에 품은 지) 만 9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끔찍한 상처로 그 기억을 간직해 온 것이다.(…) 참담한 패배를 통해 간신히 얻은 깨달음.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정신도 무력에 짓밟힐 수 있고, 용기가 보상받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을 체득하게 한 곳이 스페인이었다.”
카뮈는 비애로 채 삭히지 못한 분노까지 담은 격하고 장중한 어조로, 그 전쟁을 남일처럼 방관했던 자유 세계가 2차대전이라는 더 참혹한 희생을 치른 뒤에야 “민주주의에는 국경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리라" 썼다. 그리고 “세상 어딘가에서 누군가 쇠사슬에 묶일 때마다 우리도 함께 묶이는 것”이어서 “자유는 모두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야말로 희생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민주주의의 공식”이라고 썼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것들과 책에 수록된 다른 이들의 진술이 모두가 기억을 잃어버린 뒤에도 의지할 만한 신념의 근거가 되어 주리라 믿는다며 긴 글을 맺었다.
카뮈의 바람과 달리 스페인내전은 한동안 ‘잊힌 전쟁(forgotten war)’이라 불렸다. 마침내 파시즘을 무찌른 2차대전 연합국의 승전고가 너무 우렁찼기 때문이었고, 더 냉정히 말하면 앞선 불의를 방관한 자유 세계가 자신들의 치부를 내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세계는 2차대전의 명분을 스스로 부정한 그 불의와 냉담을 ‘2차대전의 전초전’이라는 짧은 한 마디로 눙치며 곧장 히틀러란 악마를 끌어다 앉혔고, 전후 냉전 이데올로기로 파시즘에 맞선 스페인공화국 인민정부와 외롭게 그들 편에 섰던 좌파와 무정부주의자들과 20만 명 내전의 희생을 폄하했다.
'링컨여단의 마지막 병사' 델머 버그(Delmer Berg, 1915~2016)를 소개하며, 스페인내전이 어떻게 시작됐고 카뮈 세대의 인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살펴본 바 있다. 이번 ‘가만한 당신’의 주인공 앙헬레스 플로레스 페온 (Ángeles Flórez Peón, 1918.11.17~ 2024.5.23)은 그 전쟁의 마지막 여성 민병대원이었다.
그는 17세에 민병대에 가담해 프란시스코 프랑코 파시스트 반군과 그를 지원한 나치와 싸웠고, 1년여 뒤 체포돼 모진 고문 속에 4년 옥살이를 했고, 프랑코 정권의 위협을 피해 30세에 프랑스로 피신, 만 55년 간 망명 생활을 했다. 2003년 만 85세에야 귀국한 그는 내전의 잊힌 역사를 세상에 환기시키며 옛 동지들, 특히 여성 전사들의 꿈과 이상을 알리는 데 남은 생을 바쳤다. “나 자신이 아니라 쿠데타 파시즘에 맞서 희생된 이들, 전선에게 음식을 나르다 전사하고 공화당원이라는 이유로 감옥에서 총살 당한 모든 여성들을 대변하고자 한다. 내 기억 속에는 그 끔찍한 장면들이 뚜렷이 새겨져 있다. 남자들은 싸웠고 용감했고 그래서 인정 받았지만, 대다수 여성들은 잊혔다. 그것은 불공평하다. 너무 불공평하다. 기억조차 없다면 우리는 무엇인가. 아무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는 가장 오래 살아낸 마지막 내전 전사인 동시에, 숨지던 순간까지 망각과의 전쟁을 치러낸 만 105세의 현역 전사였다. 그리고, 자신이 몸담았던 스페인 사회당을 채찍질하며 내전의 대의였던 공화주의를 웅변했다. 스페인내전의 무명 영웅 앙헬레스 플로레스 페온이 별세했다.
플로레스는 만년의 에세이에 “나는 97년 전 태어났고, 늘 반항적이었다. 아스투리안 여성은 늘 전사였기 때문이거나, 내가 9살 되던 해에 이혼한 어머니를 닮았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썼다.
이베리아 반도 북부 아스투리아스 왕국은 8세기 초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끝까지 막아낸 가톨릭 왕조이자 15세기 말까지 근 8세기 동안 이어진 국토 회복 운동 즉 ‘레콩키스타(Teconquista, 재정복)’의 거점이 된 지역. 스페인(가톨릭 문화와 정신)의 뿌리라는 자부심을 지닌 자치지구다.
그는 칸타브리아 산맥 자락의 옛 아스투리아스 탄광 마을 블리메아(Blimea)에서 광부 아버지와 조산사 어머니의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다. 유년기 스페인은 군국주의 봉건 왕정과 그에 결탁한 가톨릭 부패 권력, 고질이 된 지역 분리주의 운동으로 늘 정정이 불안했고 빈부격차도 극심했다. 1923년 군부는 20세기 초 혁명 열기에 들떠 있던 공산-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세력을 짓밟으며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대공황과 민중 저항이 겹쳐 30년 자멸했다. 그해 총선에서 좌파와 온건공화주의자 연합이 승리하면서 스페인 제2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는 12세이던 자신이 어머니 손을 잡고 승리의 가두행진 대열에 섞여 덩달아 환호했던 일을 기억했다.
그는 유년기를 단 두 단어, 공포와 굶주림으로 요약했다. 가난 때문에 인형을 갖고 논 적이 없었고, 학교는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다. 교회는 늘 현실 순응과 죄악, 지옥을 이야기했다. 어머니가 이혼하던 만 9세 무렵부터 그는 가사노동자로 생계를 거들어야 했다. 뭔가 달라지리라는 제2공화국의 달콤한 꿈은 36년 프랑코 반군의 쿠데타-내전으로 허물어졌다. “우리에겐 유년시절이란 게 없었다.”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자서전 '미완의 시대'에서, 20세기 초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지식인들에게 끼친 공산주의의 가장 강력한 유혹으로 ‘피억압자에 대한 연민’을 꼽았다. 미국인 저널리스트 애덤 호크실드도 논픽션 ‘스페인내전-우리가 그곳에 있었다’에서 억압의 정치 권력과 부에 취한 종교권력, 토지와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공정한 분배를 거부당한 채 신음하던 이들을 격려하며 희망을 갖게 하고 싸움에 앞장서 준 게 공산-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였다고 썼다. 1930년대 카뮈를 비롯한 “우리 모두의 가슴을 뜨겁게 만든 그 싸움의 전역(戰域)”이 스페인이었다.
탄광 노동자 겸 사회주의 활동가였던 플로레스의 큰오빠가, 내전의 전초전 격인 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 광산 총파업-봉기에서 우익 군벌 토벌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2년 뒤 플로레스도 스페인사회당 산하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했다. 사회주의 연극 ‘세상의 빈자들이여 봉기하라’의 주인공 ‘마리쿠엘라(Maricuela)’ 역을 맡아 마지막 리허설을 하던 1936년 7월 18일 내전이 터졌다. 그는 그길로 지역 민병대에 ‘마리쿠엘라’란 이름으로 가입했다. 오빠를 비롯한 34년의 희생자들을 기려 만든 민병대 ‘카르바인의 순교자들(Martyrs of Carbayin)’이었다.
2016년 인터뷰에서 그는 “나는 소총을 든 적이 없었다. 대신 음식을 만들어 포탄과 총탄이 빗발치는 참호의 전사들에게 나르는 게 내 임무였다”고 말했다. 그는 용케 살아남았지만 오랜 친구와 연인을 그 전장에서 잃었다. 36년 말 공화군 지침에 따라 여성 민병대원들은 대부분 후방으로 전속됐고, 그도 히혼(Hijon)의 한 야전병원에서 부상병을 돌봤다. 이듬해 10월 반군은 북부지역을 장악했고 그도 체포돼 약식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공화파에 대한 프랑코 독재정권의 정책은 한마디로 말살이었다. 실종(피살), 약식재판-사형(혹은 징역)- 조건부 자유- 직업·재산 상실- 망명. 플로레스는 15년 형으로 감형 받았다가 41년 8월 가석방됐지만, 집요한 감시를 받으며 매달 한 차례 법원에 출두해 ‘전향’ 여부를 검증받아야 했다. 출옥 후 그는 탄광지역 여러 곳에서 술집과 약국 점원으로 일했고, 46년 사회주의 활동가 출신 한 남성(Graciano Rozada,2003년 작고)과 결혼했다. 남편은 47년 8월 프랑스로 먼저 망명했고, 이듬해 3월 플로레스도 생후 10개월 된 첫 딸을 안고 밀항선을 탔다. 부부는 스페인사회주의노동자당(PSOE) 프랑스 망명지부에서 활동하며 프랑코 독재정권에 대한 직간접적인 저항운동을 지속했다. 남편이 숨을 거둔 2003년까지 만 55년 망명생활 동안 틈틈이, 플로레스는 자녀(1녀1남)들이 선물한 타자기로 흐릿해져가던 내전의 기억들, 특히 여성 동지들의 이야기들을 기록했다.
전장에서 잠깐의 휴가를 얻어 집에 다녀온 사이 자기 대신 참호로 음식을 나르다 포탄에 희생된 옛 친구. 프랑코의 감옥이 강요하던 굴욕과 고문, 굶주림, 그리고 ‘산책’이라 불리던 불시의 처형과 밤마다 들리던 형장의 총성, 수녀-간수들이 강요하던 기도와 프랑코 찬가. 플로레스는 무신론자였다. “신이 없다는 건 내겐 자명한 사실이었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어려서부터 노동하게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풍요로운 부자들과 아무것도 없는 가난한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기억들을 기록하고 알리고 희생된 이들이 염원하던 바를 일깨우는 것을 전장과 감옥, 서러운 망명지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소명이라 여겼다. 남편의 유해를 안고 귀국해 히혼에 정착한 만 85세의 그가 맨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사회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서로 으르릉거리며 따로 하던 ‘카라바인의 순교자들’ 추모행사를 함께 하도록 설득한 일, 곧 좌파의 연대였다. 모든 좌파 이념과 사상의 뿌리가 소외되고 억압받는 이들과의 연대라는 신념과 의지. 2018년 'Publico' 인터뷰에서 그는 죽음을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던 옛 동지들을 환기시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래서 눈물이 나고, 그 눈물이 내게 힘을 내게 합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 지금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서. 우리에겐 단결된 좌파가 필요합니다.”
그는 2009년 내전 회고록 ‘앙헬레스 플로레스의 기억’과 귀국 후의 경험과 단상들을 정리한 책 ‘마리쿠엘라의 놀라움(2013)’을 출간했다. 각종 강연과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내전의 정신을 일깨우고, 자유와 존엄을 위해 싸우고 있는 이들의 헌신을 옹호했다.
결혼식 전날 남편에게 “집안의 가구처럼 지내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는다”고 못박았다는 그다. 그는 평생 페미니스트였고, 게이 프라이드에 만년까지 빠짐없이 참가하며 동성애자 인권과 존엄을 위해 함께 싸운 동지였다. 그리고 말년까지 가난한 이들의 연금 권리 등을 위해 투쟁했다.
2014년 만 95세의 그는 페이스북 계정을 개설, 자신의 정치적 단상을 글로 쓰기 시작했다. 2016년 10월 페이스북에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상황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걸 봐 왔다. 우리는 자유를 위해 계속 싸워야 한다. 여성들의 일자리는 점점 더 불안정해지고 있고(…) 낙태 금지 논쟁까지 갑자기 불거졌다. 그리고 여전히 자신이 여성의 삶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여성을 구타하고 살해하는 남자들이 있다. 그들은 남자가 아니라 범죄자다”라고 썼다.
“파시스트들은 지금도 여전히 자유를 훼손하기 위해 도사리고 있다”고도 썼다. 2018년 폴리티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억이 없는 나라는 영혼이 없는 나라”이며 “오늘의 스페인은 점차 영혼을 잃고 있다. 우리는 과거를 기억해야 하고, 그들(파시스트)처럼 되지 않기 위해 결코 분노에 잠식당해서도 안 된다.”
그는 낙상 사고로 두 차례 고관절 수술을 받았고 만년에는 보행보조기 없이는 걷지 못했다. 하지만 2022년 인터뷰에서 그는 "그런 사고도 극복했고 여전히 건강해서 나를 진찰한 의사들은 모두 놀란다. 나를 지탱해 준 힘은 사회주의 사상이지만 더 나아가 내전과 독재기간 고문당하고 살해당하고 역사에서 지워진 여성들에 대한 오랜 기억과 그들에 대한 헌신의 의무가 나를 버티게 했다. 프랑코주의자들의 목소리를 압도하고 싶었고, 내 생각에 나는 승리해 왔다. 그리고 나는 단 한 순간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2016년 10월 스페인 페미니스트 단체 ‘Club de las 25’가 주는 “자유와 민주주의 수호” 공로패를 받았고, 2018년 스페인노동자총연맹(UGT)의 ‘March 8 Award’를 수상했다. 앞서 2015년 아스투리아스 사회주의자 청년단(SYA)은 그를 종신 명예회장에 추대했고, 주의회는 2023년 ‘아스투리아스의 자랑스러운 딸’로 그를 호명했다. 그는 그 어떤 상보다 2016년 손녀가 “할머니로서뿐 아니라 한 여성으로서 당신을 존경한다”고 말해 준 게 인생 최고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2018년 총선으로 사회노동당이 집권했다. 평생 당원인 그는 정부에 “겸손할 것과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전자는 좌파 연대의 요구였고 후자는 사회노동당 공약이던 ‘역사 기억법’을 성실히 이행하라는 촉구였다.
그가 떠나자 아스투리아스 사회노동당(FSA-PSOE)은 영결식까지 사흘을 애도기간으로 정해 모든 공식 행사를 중단했다. 주지사 등 수많은 이들이 애도 행렬에 동참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대견한 손자를 대하듯 그의 뺨을 어루만지는 플로레스의 사진과 함께 “평등과 자유, 정의와 존엄을 위한 105년의 헌신과 투쟁. 영면하세요, 마리쿠엘라”란 글을 자신의 X계정에 남겼다. 애도의 꽃으로 그가 고른 건 전사의 심장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