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실질적 지도자 마린 르펜 하원 원내대표가 "우크라이나는 러시아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해 파장을 낳고 있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돌풍을 일으킨 RN은 임박한 프랑스 총선에서도 다수당이 유력한 상황이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우크라이나 전쟁 입장 변화 예고탄으로 해석되고 있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에 맞서 유럽을 이끌었던 프랑스가 의회 해산·조기 총선 등 극도의 정국 혼돈에 빠지면서 유럽 안보 지형까지 흔드는 형국이다.
르펜 대표는 17일(현지시간) 공개된 스페인 일간 엘 페리오디코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가 분명히 이길 수 없는 전쟁으로부터 긍정적인 해결책을 얻기 위해서는 러시아와 대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르펜 대표는 과거부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서 프랑스 역할 축소,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 등을 주장해 온 인사다. 대선 후보였던 2017년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함께 마주 앉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언론은 그를 '푸틴의 친구'라 부른다.
르펜 대표는 이날 서방의 대러 제재와 우크라이나 지원 정책을 놓고 넘지 말아야 할 '레드라인'이 있다고도 주장했다. 그는 "(러시아를 향한) 제재가 우리의 등을 향하지 않도록 신중해야 한다는 것이 첫 번째"라며 "우리가 벌이는 에너지 전쟁이 프랑스 경제에 파괴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했다. 또 2차 세계대전의 상처를 거론하며 "(우크라이나와) 공동 교전국이 되지 않는 것이 두 번째 레드라인"이라고 말했다.
르펜 대표의 러시아 옹호 발언은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이번 발언은 무게감이 다르다. 총선 여론조사에서 지지율 29.5%로 1위를 달리는 RN이 오는 30일과 내달 7일 예정된 선거에서 실제 압승할 경우, 프랑스 총리를 RN이 차지하고 르펜 대표는 사실상 정국 주도권을 쥐게 된다. 여소야대 지형에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사임 압박에 시달릴 수도 있다. 지금껏 유럽에서 가장 강경했던 프랑스의 대(對)러시아 노선이 180도 달라질 수 있음을 시사한 발언이 최근 기세를 탄 극우 지도자의 입에서 나온 셈이다.
미 블룸버그통신은 프랑스가 우크라이나에 약속했던 △자국군 훈련 교관 파병 △연내 최대 30억 유로(약 4조 원) 규모의 추가 군사 지원 △우크라이나 인프라(사회기반시설) 재건 사업 등이 줄줄이 중단될 가능성에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이 불안해한다고 소식통을 인용해 이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 본토까지 날아가 정밀 타격할 수 있는 미라주 2000-5 전투기 지원 계획도 불투명해졌다.
프랑스 혼자만의 문제도 아니다.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우크라이나 지원 등 EU나 주요 7개국(G7) 정상 차원에서 이뤄진 합의도 흔들릴 수 있다. 블룸버그는 "모두 프랑스를 바라보며 EU 정책에 미칠 잠재적인 영향을 따져보고 있다"고 전했다.
가장 불안한 건 물론 우크라이나다. 오는 11월 치러지는 미국 대선에선 역시 유럽 전쟁 개입에 소극적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마침 러시아는 연일 우크라이나를 향해 점령지를 내주고 휴전 협상에 나서라고 압박하고 있다. 세르게이 나리시킨 러시아 대외정보국(SVR) 국장은 이날 타스통신 인터뷰에서 "현재 조건의 협상이 거부될 경우, 다음 협상은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