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이효리는 어머니인 전기순씨 집에 지난 2월 마건영 PD를 데리고 갔다. 마 PD가 이효리 모녀가 함께 여행을 떠나는 JTBC 예능프로그램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를 기획해 이효리의 어머니를 섭외하는 자리였다.
이 만남은 2년 만에 성사됐다. 마 PD가 이효리에게 처음 '모녀 여행' 얘기를 꺼낸 건 2022년이었으나 프로젝트는 진행되지 못했다. 이효리 아버지의 건강이 좋지 않아서였다. 코로나19 시기가 끝나고 이효리 부모의 상황이 여유로워지면서 모녀 여행 프로젝트가 다시 급물살을 탔다. 집까지 찾아온 마 PD의 제안을 전씨는 흔쾌히 수락했다. 막내딸인 이효리는 그에게 늘 그리운 존재였다. 연예 활동으로 일찍 엄마 품을 떠났고 결혼 후엔 제주로 터전을 옮기면서 사이가 멀어졌기 때문이다.
"'대만으로 모녀가 여행을 떠났는데 너무 싸워서 귀국한 뒤 어머니는 따로 택시를 타고 가고 딸은 남편 차 타고 집에 가면서 펑펑 울었다'는 지인 얘기를 듣고 놀란 적이 있어요. 엄마와 딸은 늘 가까울 줄 알았거든요. 그 후 제주도에 내려가 이효리씨를 만났을 때 '엄마랑 친해요?' 물었더니 '일주일에 연락 한 번 할까 말까'라고 하더라고요. '(남편인) (이)상순 오빠가 나보다 엄마랑 연락 더 자주 해'라면서요. 그 말 듣고 추진했죠." 16일 한국일보와 전화로 만난 마 PD의 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는 여행이 아닌 모녀의 이야기를 조명한다. 이효리 모녀는 이발사의 아내이자 딸이었다. 여섯 식구는 이발소에 딸린 단칸방에 살았다. 손님이 오면 부모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가게로 바쁘게 나갔고 네 남매도 허겁지겁 밥을 먹었다.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해 경주로 여행을 가서도 밥을 빨리 먹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효리 모녀는 웃었다.
딱지가 내려앉지 않는 서로의 상처도 들춘다. 이효리는 함께 저녁을 먹던 전씨에게 "엄마랑 아빠랑 같이 있으면 아직도 무슨 일이 벌어질까 싶어 약간 긴장한다"고 말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 옆에서 모녀는 불안했다. 전씨는 "그런 점에서 너희들에게 미안하다, 엄마로서"라고 눈물을 훔치고, 이효리는 그런 어머니를 챙기지 못한 걸 자책한다. "엄마가 힘들 때 내가 어려서 할 수 있는 게 없어 무력감을 너무 많이 느꼈어요. 고통스러운 시간으로 가슴에 남아 있고요. 그러면 더 엄마한테 잘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그 반대로) 엄마를 피하게 되더라고요. 미안함 때문인지, 옛날 저의 무기력함을 다시 확인하는 게 두려워서였는지 모르겠지만요." 이효리의 말이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는 이렇게 가부장제 속 모녀의 위기와 애증을 보여준다. 지난달 26일 첫 방송 된 후 포털 사이트 프로그램 공개 대화방엔 "엄마의 사랑과 고생을 알지만 또 그래서 난 엄마의 감정받이로 살아야 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도 말 못 했던 어린 시절의 나. 엄마가 보면서 '이효리 모녀가 우리 같다'며 보라고 했다" "엄마에게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내 딸에게 나는 어떤 엄마일까" 등의 글이 올라왔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는 두 가지 측면에서 시청자의 관심을 산다. ①아버지(MBC '아빠! 어디가?'·KBS2 '슈퍼맨이 돌아왔다')와 아들(SBS '미운 우리 새끼') 중심으로 가족관계를 그렸던 예능프로그램 설정을 벗어나 이례적으로 어머니와 딸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모녀의 얘기에 귀 기울인다는 점. 또 ②중년이 된 딸과 노년기에 접어든 엄마를 두고 애틋한 모습만 비추는 데 그치지 않고 대부분의 모녀가 겪고 있는 지겹고 미운 감정까지 다층적으로 다룬다는 점이다. 복길 대중문화평론가는 "'효리(孝利)'란 이름을 '효도하라'는 뜻에서 지었다는 말을 듣고 지은 이효리의 표정, 가난한 시절 먹었던 오징엇국을 어머니와 함께 먹다가 방으로 들어가 우는 이효리의 눈물에는 귀하지 않은 딸로 자랐다는 원망과 엄마의 젊은 시절에 대한 연민이 함께 느껴졌다"며 "엄마와 딸의 관계가 모성 신화 없이 여성과 여성 간의 감정으로 비치는 대목이 인상 깊었다"고 평했다.
'엄마, 단둘이 여행 갈래?'에서 작은 체구에 종종거리듯 바쁘게 오징엇국을 준비하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이효리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아 눈물을 훔친다. 제작진에 따르면, 이 모습을 별도의 공간에서 모니터로 지켜보던 모든 스태프가 눈물을 떨궜다. 윤김지영 창원대 철학과 교수는 "엄마와 딸의 관계는 공적으로 다루기에는 너무도 사적이며 사소한 여자들 간의 이야기로 치부된 경향이 있다"며 "모녀 서사를 강조한 예능에 대한 관심은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여겼던 모녀 관계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서로에게 누락되어왔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고 해석했다.
방송가에선 아버지와 아들 중심 가족 서사의 틀을 깬 예능 프로그램이 잇따라 제작되고 있다.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웨이브의 '연애남매'에선 다섯 쌍의 남매가 모여 서로의 연인을 찾아간다. 남매가 예능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나오기는 이례적이다. 모녀 예능, 남매 예능의 등장은 대중문화 전반의 여성 서사 강화 흐름과 맞닿아 있다. 17일 기준 '전국노래자랑' '1박2일'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살림하는 남자들' '슈퍼맨이 돌아왔다' '불후의 명곡' 등 KBS 6개 주말 예능 프로그램에 고정 출연하며 진행을 맡는 연예인 13명 중 여성은 3명(23%)에 그친다. TV에서 여성 방송인들이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모녀, 남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예능프로그램 기획은 여성 이야기를 들려주는 데 인색했던 예능가 제작 풍토를 고려하면 새로운 변화다.
모녀, 남매가 예능의 새 주인공으로 등장하면서 가족 서사는 점점 확대되고 있다. '연애남매'에서 출연자 주연은 "오빠한테 너무 고마워서 '다시 태어나면 (오빠의) 누나로 태어나 잘해주고 싶다'고 어려서 생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투박한 형제애, 연대의 자매애를 공유하는 남매애를 보며 시청자들은 가족이라 아팠던 옛일을 위로받는다. 40대 중반의 여성 시청자 임모씨는 "남동생과 어려서 죽자고 싸우기만 했는데 '연애남매'에서 서로를 위해주는 남매들의 모습을 보며 힐링이 되더라"며 "그런 판타지 같은 남매애가 오히려 누군가의 연애보다 흥미로웠다"고 말했다.
1, 2인 가구가 점점 증가하는 현실과 달리 예능 콘텐츠 속 가족 서사의 확대는 관계성 약화의 반작용으로 읽히기도 한다. 김헌식 중원대 사회문화대 특임교수는 "'위험사회'에서 어떻게든 혈육을 통해 지지받고 안전함을 확인하고 싶은 열망의 반영"이라며 "한 자녀 가정이 많아지는 추세에서 남매·자매·형제 관계가 희소해지며 요즘 방송 소재로 활용되는 것"이라고 봤다. '연애남매'를 제작한 이진주 PD는 남매 다섯 쌍을 찾기 위해 섭외에 6개월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