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윤석열 정부가 석유 시추 이야기를 꺼냈죠. 그러면서 '과학을 정치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과학인데 이걸 의심하면 너희들은 정치적'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반대자들의 의심을 불식할 만한 과학적 근거 자료 같은 건 제대로 내놓지 않았어요. 과학은 무엇인가, 정치와 어떻게 분리되는가, 과학과 정치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같은 질문이 제기될 수밖에 없는데, 그때에 이 사람처럼 정교한 대답을 내놓은 사람이 또 있을까요."
최근 경기 고양시 일산동구 자택에서 만난 박동수(40) 사월의책 편집장은 주저 없이 프랑스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1947~2022) 이야기를 꺼냈다. 라투르는 '행위자 연결망 이론'을 통해 국내에선 과학기술학(STS)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나 일부 알려진 학자였다. 그럴 즈음인 2012년 '브뤼노 라투르의 과학인문학 편지'라는 대중서를 번역, 소개하면서 라투르의 이론을 한국에 처음 널리 알리는 데 성공했다.
라투르는 과학이 인간과 일정 정도 거리가 있었던 예전과 달리, 과학이 첨단으로 발달해서 인간의 삶에 너무나 밀착해버린 지금은 과학이 정치의 대상이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기에 라투르는 인공지능(AI) 등 과학적 이슈가 점점 더 커질 미래에서도 계속 불려 나올 학자다. "기후위기에 대해서도 철학자로서 가장 먼저 목소리를 높인 사람이 라투르입니다. 앞으로 더 커질 기후위기, 생태담론 등에서 라투르의 중요성은 커질 수밖에 없는 거죠."
말만 들어도 어렵고 힘들게 느껴지는 '철학책 편집자'의 길. 그 길을 왜 택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했다. "시추 이전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있었고, 그 훨씬 이전엔 광우병 사태도 있었는데, 그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해야 할지 이처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게 바로 철학 아니냐"는 항변 아닌 항변이다. "물론 어렵기는 하죠. 일반인들 입장에선 철학이란 학문이 오랜 시간 쌓아온 개념이나 논리 같은 것에 익숙지 않은 게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처음 읽을 때의 그 허들을 조금만 넘어서면 더할 나위 없이 재미있어지는 게 또 철학책 읽기예요."
물론 이때 철학책이란 정통 철학서라기보다는 철학적 개념을 가지고 현재 우리들에게 의미를 묻는, 조금 더 묵직한 인문학 책에 더 가깝다. 박 편집장은 "지금 시대에 플라톤과 데카르트에 대한 정교한 주석서를 만드는 것 또한 그 자체로 의미가 있겠지만 지금 우리 시대를 말해주는 철학을 해야 한다고 본다"며 "일반 인문서보다 개념의 추상화 정도가 좀 더 높은 인문서 정도로 철학의 범위를 넓히고 싶다"고 말했다.
실제 지금 시대 우리 얘기와 겹치는 철학책은 적지 않다. 박 편집장은 C 티 응우옌이라는 베트남 출신 철학자가 쓴 '게임: 행위성의 예술'을 꺼냈다. 응우옌은 게임의 핵심을 '분투 과정을 즐기는 것'으로 간주하고 게임을 퍼포먼스, 행위성의 예술로 설득력 있게 분석했다. 석사 논문을 발전시킨 김지효의 '인생샷 뒤의 여자들' 같은 책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시대 셀카 찍기에 여념이 없는 여성들의 행동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되짚었다. 중국계 철학자 허욱이 쓴 '디지털적 존재의 대상에 대하여'는 오늘날 구글이나 페이스북 문제에 대한 통찰이 번뜩일 정도다.
박 편집장은 "의외로 지금 시대를 철학적으로 흥미롭게 다룬 책들이 많은데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이 아쉽다"고 말했다. 그 아쉬움은 펼쳐 보이는 책마다 좍좍 그어져 있는 밑줄이며 별표 같은 흔적에서 여실히 드러나 보였다.
그래서 박 편집장은 철학책 전도사 노릇도 열심히 한다. 뜻이 맞는 민음사의 신새벽 편집자와 함께 2019년 '철학책 읽는 편집자 모임'을 만들었다. 내는 책을 보고 철학에 관심 있구나 싶었던 편집자들을 알음알음 모았다. 지금은 12명으로까지 회원이 늘었다.
모임에서 읽을 책은 최근 출간된 철학책 중 투표로 선정한다. 지금까지 읽은 책으론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적 감정', 리처드 로티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 오혜진 등이 지은 '원본 없는 판타지',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돌아가다' 등 50여 권이 넘는다. 이때 경험을 정리해 '철학책 독서 모임'이란 책을 직접 써서 냈다. 신 편집자가 내는 '탐구' 시리즈 1권으로 발간됐다. 탐구 시리즈는 인문서를 좀 더 젊은 감각으로 만들어보기 위한 시도다.
일반인을 상대로 한 책 읽기 모임도 한다. 지난해 일산의 한양문고에서 시작했는데, 이 모임은 아무래도 일반인 대상이다 보니 고르는 책의 범위가 다소 넓어졌다. 존 버거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 김원영의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 우춘희의 '깻잎 투쟁기' 같은 책이다. 박 편집장은 "기본적으로 책에 관심 있는 분들이 오시는 프로그램이기도 하지만, 그간 잘 몰라서 못 읽었던 좋은 책을 접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반응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이 외에도 말과활 아카데미 같은 곳에서는 몇 주짜리 프로그램을 짜서 1년에 3, 4번 정도 철학 강의도 진행한다. 서평지 '교차'에서 기획위원으로 참여 중이다. 활동 범위를 더 넓히고 싶지만 이 정도만 해도 책을 만드는 '생업'과 함께 병행하기엔 벅차다.
일반인들은 철학책에서 무엇을 얻어갈 수 있을까. 박 편집장은 답이 궁금한 질문이 제기됐을 때 철학책이 일종의 해독제가 될 수가 있다고 강조했다. "어떤 새로운 관점이나 새로운 생각을 도입함으로써 지금까지 우리가 경험해왔던 것들을 완전히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몇 번 그렇게 하다보면 타자를 보는 눈이, 사고방식이 유연해져서 어떤 상황에서도 대처 가능하도록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지 않나 생각합니다."
박 편집장은 일본 철학자 아즈마 히로키 얘기를 꺼냈다. 25년 전 히로키는 '해체주의'로 유명했던 자크 데리다의 철학을 자신의 방식으로 읽어낸 '존재론적, 우편적'(한국에선 2015년 번역 출간)을 내놔 철학계에서 크게 이름을 얻었다. 최근 일본에선 그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이 모여 발간 25주년 기념 심포지엄을 열고 이를 책으로 묶어냈을 정도다.
그런데 히로키 본인은 학계에서 자리 잡지도 않고 데리다 철학도 그만두고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다 불쑥 '관광객의 철학'이란 책을 냈다. "우리는 늘 우리의 커뮤니케이션이 성공적이라 확신하는데, 그게 오늘날 골치 아픈 정치적 양극화, 진영 간 극한 대립의 원인이라 진단합니다. 모든 커뮤니케이션은 늘 정정과 수정 가능성이 존재하니까요. 그래서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건 어느 진영에 속하기보다 열린 마음으로 휘휘 둘러보고 떠나는 '관광객의 마음'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에요. 우리 머리를 식혀주는 좋은 접근법 아닐까요. "
은근한 보람도 있다. 철학책은 '가늘고 긴' 시장이다. 한 번에 확 팔려나가지도 않지만, 괜찮은 책을 내놓으면 은은하게 이어진다. 괜찮은 책을 잘 고르면 절판이 드물다. "지난해 제가 몸담은 출판사 사월의책의 출간 리스트가 100종을 넘겼어요. 절판되지 않고 많진 않아도 꾸준히 나가는 책들이 쌓이다 보니 출판사 운영이 이제 어느 정도 안정적이 됐어요." 덕분에 아직은 철학책을 더 읽고, 더 알릴 기회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