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은 어쩌면 '한국 에너지 전환이 시작된 해'로 기록될 수도 있었다. 그해 11월 전북 서해안 일대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이명박 정부가 부안 먼바다에 대규모 해상풍력발전 단지를 설치하겠다고 발표하면서다. 정부가 표방하던 '녹색성장'의 일환이었다. 국내 굵직한 기업들도 참여했다.
반면 과거 에너지 정책 답습 흐름도 여전했다. 같은 해 강원 삼척시에서 시멘트 제조 공장을 운영하던 동양그룹은 폐광산 부지에 신규 석탄화력발전소를 건설하겠다고 나섰다. 이미 국제 탄소 규제가 강화되고 있어 정책 역행이라는 비판이 많았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2011년생 동갑내기 발전소'가 각각 추진되기 시작한 지 13년이 지난 현재, 두 발전소의 운명은 극명하게 갈렸다. '서남해 해상풍력발전 사업'은 본 사업을 위한 삽조차 뜨지 못했다. 반면 삼척 석탄발전소는 2014년 사업권이 포스코(포스파워)로 넘어간 뒤 '삼척블루파워'라는 이름으로 올해 완공됐다. 석탄이 살아남고, 바람은 꺾인 것이다.
이는 양극화된 한국 정치가 장기 국정 과제 대응에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화석연료 체제의 관성을 벗어나려면 강도 높은 정책이 필요했지만 개혁 시도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사실상 백지화됐다. 특히 재생에너지와 원자력발전 지지로 분열된 정치 지형은 정책을 널뛰게 한 주범이었다.
한국일보는 창간 70주년을 맞아 향후 30년 한국 사회가 초당적으로 협력, 해결해야 할 과제를 제언한다. 첫 번째 주제는 기후변화 대응, 그중에서도 에너지 전환 정책이다. 국내 전력은 아직도 60%가 화석연료를 태워 생산된다. 그로 인한 온실가스 배출량은 국가 전체의 30%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수송(전기차), 산업(설비 전기화), 난방(히트펌프) 등 '깨끗한 전력'에 기대는 다른 부문의 탄소 중립 정책도 요원하다.
어떤 제도들이 화석연료 발전을 지탱하고 있는가. 에너지 전환 시도는 왜 무너졌을까. 향후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3회에 걸쳐 진단한다.
2011년 11월 11일 서울 강남의 한 호텔. 이날 4층 행사장은 국내 에너지 관련 인사로 북적였다. 김정관 당시 지식경제부 차관부터 정헌율 전북 부지사, 김중겸 한국전력 사장 등 정부·공기업 고위직 인사뿐 아니라, 굵직한 제조사 8곳의 임원들도 총집합했다. 두산중공업(두산에너빌리티), 현대중공업(현대건설), 삼성중공업 등도 포함됐다.
행사 이름은 '서남해 해상풍력 종합추진계획 협약식'. 앞서 2년 동안 소문만 무성하던 '녹색성장 정책'의 세부 그림이 세상에 등장한 순간이었다. 정부는 한국 조선·기계산업 경쟁력을 바탕으로 전북 부안·군산 앞바다에 2.5기가와트(GW·1GW급 발전설비는 이용률 100% 기준 250만 가구가 매일 사용할 전력 생산) 규모 해상풍력 단지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다. 국제 탈(脫) 탄소 흐름에 맞춰 해상풍력 산업 진흥을 통해 '녹색'과 '성장'을 동시에 챙기겠다는 취지였다.
이날 김정관 차관은 "이 사업은 향후 한국의 신국부 창출을 견인할 중차대한 사업"이라며 "정부도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사업은 한국전력이 특수합작법인(SPC) '한국해상풍력'을 만들어 주관하고, 제조사들은 풍력 터빈을 만들어 공급하기로 했다.
당시 산업계도 이 발표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일각에서는 "이명박 정부가 사실은 원전을 잔뜩 짓고 싶으면서도 '물타기' 차원에서 재생에너지 사업을 앞세운다"고 의심했지만, 실제 '녹색 바람'이 불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국제사회가 선도국만 탄소 감축 의무를 지던 '도쿄의정서(1997년)' 체제를 떠나 모든 국가가 규제를 받는 '파리기후협정(2015년)' 체제로 이행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당시 사업 참여 기업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한 관계자는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국내 조선사들은 이미 해양플랜트 기술을 확보하는 등 풍력산업을 선도할 경쟁력은 충분하다고 판단했다"며 "정권 기조에 맞춰주기 위해 구색만 갖추는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반면 2013년 2월 4일 강남 한국전력 사옥에는 환경단체 활동가가 몰려들었다. 이날 정부는 6차 국가전력수급기본계획(전기본) 발표를 앞두고 공청회를 열었다. 전기본은 향후 15년치 전력 생산을 다루는 국가 계획으로, 대형 발전소 건설의 출발점으로 인식된다. 이 계획에는 삼척블루파워를 포함, 신규 석탄발전소 12기를 추가로 짓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환경단체들은 이 계획을 두고 "졸속 추진"이라고 질타했다. 석탄발전 증설 계획이 2011년 9월 15일 초유의 정전 사태 여파로 성급하게 반영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부는 가을철 전력 수요를 과소평가했고 그 결과 일부 지역이 전력 공급을 끊는 '후진국형' 순환정전 사태를 맞았다. 이후 예비 전력 수요를 확보해야 한다는 조바심을 타고 기업들의 '석탄 러브콜'이 쏟아졌다. 동양그룹도 2011년 11월 삼척 석탄발전소 건설을 위한 특수합작법인(SPC) '동양파워'를 만들고 이듬해 7월 지식경제부에 건설의향서를 제출했다.
실제 6차 전기본은 당시 위원회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불과 2년 전인 2009년 정부가 온실가스 감축 목표(2020년 배출전망치 대비 30%)를 공식화했던 것과 대비됐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삼척블루파워의 설비 용량은 2.1GW로, 연간 탄소배출량이 약 1,300만 톤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2021년 한국이 감축한 온실가스(2,220만 톤)의 58.5%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다.
당시 전기본 분과위원이었던 조영탁 한밭대 경제학과 교수(전 전력거래소 이사장)는 "탈탄소 기조와의 정합성을 위해 배출량이 비교적 적은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소를 지어야 한다고 지적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6차 전기본 공청회는 환경단체 항의로 30분 만에 종료됐다. 그러나 정부는 2013년 2월 24일 서남해 해상풍력과 삼척블루파워가 나란히 이름을 올린 계획을 확정 발표했다. 계획은 둘 다 챙기겠다는 것이었지만 실제 운명은 엇갈렸다.
전기본 공개 이후 삼척블루파워는 호랑이 등에 탄 것과 같았다. "탄소 규제가 강화되면 발전소를 가동하지 못할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됐지만, 일단 시작된 석탄 발전사업을 중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우선 기업 입장에서 석탄발전소는 무조건 손해 보지 않는 수입원이었다. 국가가 비용 상당 부분을 보전해 주는 '총괄원가보상제'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전력망을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발전소에 전기 생산 및 중단을 명령할 수 있는데, 그 대가로 건설투자비와 고정비용을 '용량요금'(CP)이라는 형태로 지원해줬다. 국가 기간시설인 발전소가 망하지 않도록 정부가 최소 수익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한국신용평가는 2022년 삼척블루파워에 대해 "탄소중립 정책 등 사업변동성이 내재돼 있다"면서도 "총괄원가보장 제도를 통해 안정적인 사업기반이 확보돼있다"고 평가했다.
탄탄한 인허가 절차 역시 사업성을 보장해주는 주요 축이었다. 당시 정부는 전기본에 오른 모든 발전소에 대해 관례적으로 발전사업 허가를 내어줬고, 이 허가를 취득한 발전소는 '전원개발촉진법'에 따라 후속 인허가 절차를 손쉽게 처리할 수 있었다.
박지혜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당시 정부는 인허가를 굉장히 널널하게 다뤘다"며 "일단 민간사업자가 발전사업 허가를 받으면, 허가가 하나의 기득권처럼 작용해 후속 절차를 문제없이 진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실제 기업가치가 약 240억 원에 불과했던 동양파워는 2013년 7월 발전사업 허가를 받은 것만으로도 평가가 훌쩍 뛰었고, 2014년 8월 4,311억 원에 포스파워에 매각됐다.
사실 석탄발전소의 경제성과 행정 절차를 보장해주는 제도들은 과거 한국 경제에 필요한 면이 있었다. 고도성장기에 급증하는 전력 수요를 재빠르게 채워줘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제도들은 재생에너지라는 새로운 발전원에 적용하기 어려웠다.
대표적으로 서남해 해상풍력은 총괄원가보상제를 적용받지 못했다. 정부가 발전량을 통제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전력거래소 관계자는 "해상풍력 발전량은 바람 등 자연 현상에 의해 결정되므로 거래소 지시에 따라 출력을 조절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의도적인 차별이라기보다는 발전원 특성 차이에 따른 결과였다는 얘기다. 실제 해상풍력에 CP를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그 결과 해상풍력의 사업성이 불안정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12년 이명박 정부는 보조금 성격을 갖는 신재생에너지인증서(REC) 발급 제도를 도입하기는 했다. 그러나 해상풍력 발전단가는 전기 1킬로와트시(kWh·100만분의 1GWh)당 약 300원으로 매우 비싼 반면, 지원액은 160원 수준에 그쳐서 역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새 발전원에 맞는 제도 개선이 부족했던 셈이다.
더 큰 문제는 인허가 절차에서 발생했다. 서남해 해상풍력 발전단지 입지가 어민들의 어업 구역과 겹치면서 '주민수용성' 문제가 터져 나왔다. 이는 입지 선정이 비교적 자유로운 화석연료 발전소가 크게 경험하지 못한 현상이었다. 삼척블루파워는 산 중턱 폐광산 부지에 있어 인근 주민 사업에 거의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그러나 풍속, 연계거리, 지반 등 입지 제약 조건이 많은 해상풍력은 부지를 쉽게 옮기기 어려웠고, 어민과 갈등을 빚을 공산이 컸다.
군사정부 시절인 1978년 제정된 전원개발촉진법은 이 같은 갈등을 해결하는 데 적합하지 않았다. 백옥선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기존 법체계는 인허가의 마지막 단계에서 주민과 소통하도록 구성된 측면이 있다"며 "(사업 초기에) 주민 의견을 듣기 어렵게 만드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주민들이 사업에서 소외됐다고 느낄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정부와 한국해상풍력은 결국 2016년 3월 1단계 사업에 한해 전원개발촉진법 적용을 강행했다. 이에 어민 반발이 쏟아졌고 공사는 2017년에야 시작될 수 있었다. 사업은 2018년 0.06GW 규모로 준공됐다. 기존 계획보다 설비용량은 0.04GW 적고, 시점도 4년 늦었다. 이때 불거진 갈등은 사업이 향후 2, 3단계로 뻗어나가지 못하게 막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당시 사업에 참여했던 국책연구원과 사업자, 관계 부처 등은 법 제도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를 쏟아냈다. 어쨌든 탈탄소 전환은 시대적 과제였으므로 문제 해결 방안을 모색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때 제안된 내용들은 현시점에서도 해상풍력 도입을 위해 필수적인 것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국내 전문가들은 2010년부터 '계획입지 제도'를 도입하자고 주장했다. 특정 해역에 대해 정부가 먼저 인허가 및 주민 설득 절차를 마친 후에, 풍력발전기를 설치할 사업자를 공모하는 방식이다. 사업 말미에 민간 사업자가 주민과 충돌하는 사태를 방지하자는 취지다. 일종의 '해상풍력 국가책임제'로, 덴마크와 영국은 각각 1995년, 2008년부터 이러한 방식을 택하고 있다.
에너지경제연구원은 2010년 두 국가의 정책을 분석하며 "국내 정책 수립에 반영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2011년 무역투자연구원은 당시 지식경제부의 용역을 받아 계획입지제 도입을 위한 법안을 작성했고, 2015년 한국법제연구원은 산업부 용역으로 해상풍력단지 주변 지역 보상 기준을 마련했다.
그러나 정부는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에너지 전환 정책 기조가 달라졌다. 특히 전문가들은 2013년 2월 박근혜 정부로 권력이 이동한 뒤 법 개정 동력이 꺼졌다고 주장한다. 정부 관심이 원전으로 완전히 쏠리면서 재생에너지 확대 의지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실제 2015년 7월 박근혜 정부는 7차 전기본에서 신규 원전 2기를 신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반면, 재생에너지와 관련해서는 별다른 내용을 담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 당시 국책 연구기관에서 해상풍력 사업 진행을 지켜봤던 연구원은 "사업 연구를 수행해 보고해도 정부는 전혀 반응하지 않았다"면서 "사실상 지난 10여 년 동안 정부가 '양치기 소년'처럼 거짓말을 외친 것"이라고 한탄했다. 삼성중공업과 효성은 박근혜 정부 출범 1년 만인 2014년 서남해 사업 참여를 포기했고, 현재는 두산에너빌리티와 현대건설만 참여하고 있다.
2017년 5월 집권한 문재인 정부는 사업 동력을 되살리려 애썼다. REC를 통한 해상풍력 보조금 을 전기 1kWh당 대략 300원까지 높였고, 2021년 서남해 2단계 사업에 발전사업 허가도 내줬다. 같은 해 국회에서는 '해상풍력특별법(해풍법)'이 발의되며 계획입지 제도가 뒤늦게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2022년 윤석열 정부가 들어서면서 해상풍력은 또다시 휘청였다. 같은 해 4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해상풍력 사업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해풍법도 지난달 21대 국회가 종료되며 폐기됐다. 다만 현재는 여당도 해상풍력 필요성에 동의하는 분위기이며, 한국해상풍력은 민관협의회를 만드는 등 주민과 소통 창구를 늘려가고 있다.
지난 13년간 소모적인 정쟁이 남긴 결과는 처참하다. 올해 한국 해상풍력 설비 용량은 고작 0.12GW에 불과하다. 지난해 전 세계 해상풍력 설비 용량이 64GW로 2011년 대비 20배 이상 급증한 데 비하면 매우 저조한 성적표다. 원전도 정권 영향을 받기는 마찬가지여서 2011년 20GW에서 지난해 24GW로 4GW 늘어나는 데 그쳤다. 반면 석탄발전 설비 용량은 2011년 약 25GW에서 지난해 39GW까지 늘었다.
에너지 산업 전문가인 한병화 유진투자증권 연구원은 "2011년 정부 계획이 성공하기만 했어도 현재 세계적인 해상풍력기업이 최소 2개는 나왔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석탄발전 사업자들이 웃음 짓고 있는 것도 아니다. 발전소가 '좌초자산(외부 환경 변화에 의해 가치가 급락한 자산)'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점점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지난달 22일 방문한 삼척블루파워 현장은 이따금씩 공사 마무리를 위한 덤프 트럭만 오갈 뿐 활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기가스를 멀리 날려버리겠다며 250m 높이로 지은 굴뚝에선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정부가 송전망을 계획대로 늘리는 데 실패하면서 전기 보낼 곳이 없어졌고, 발전소가 놀고 있기 때문이다.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좌초자산 우려는 2010년대 초반에도 제기됐다"며 "이제는 송전망이 확충되더라도 원전·재생에너지가 먼저 접속해 석탄발전소가 정상 가동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고 우려했다. 그는 2014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도 송전제약 문제를 지적했다.
재생에너지도, 원전도, 석탄발전도 모두 미래 계획이 흔들리고 있는 게 한국 에너지 정책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정치권이 일관된 에너지 전환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박종배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지금까지 정부는 선언만 했을 뿐 치열한 고민을 하지는 않았다"며 "정량적 데이터를 바탕으로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 미래 에너지 구성에 대한 다양한 시나리오를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