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방북이 가시화되면서 윤석열 정부의 '가치외교'가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등 굵직한 이슈를 다룰 국제회의 일정이 푸틴 대통령 방북과 묘하게 겹치면서, 이들 회의 전후로 윤 정부가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관심이 쏠리고 있어서다. 일단은 신뢰에 바탕을 둔 동맹국 우선의 외교 노선에서 상당 부분 톤다운, 러시아에 우호적인 모습을 보이고자 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11일 외교 소식통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방북 일정은 일단 6월 25일 전후로 점쳐진다. 미국과 러시아 갈등의 대표 협의체라 할 수 있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를 앞둔 시점이다. 여기에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6·25전쟁이라는 북러 협력의 상징까지 함께 부각시킬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방북 자체만으로 대(對)미와 친(親)북을 동시에 챙길 수 있다는 얘기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러를 앞두고 주고받은 친서에서도 이례적으로 소련의 6·25 참전을 공식 언급한 바 있다.
전직 정보분석관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의 한국 관여를 억제하면서 러시아 입장을 적극 지지해준 북한에 외교적인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시기를 조율하고 있을 것"이라며 "24년 전 푸틴 대통령의 방북도 주요 8개국(G8) 정상회의를 앞두고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 러시아의 영향력을 과시하기 위해 이뤄진 면이 있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 같은 행보가 '가치외교'를 중시하는 윤석열 정부의 외교공간을 제한할 수 있다는 점이다. 동맹국 우선의 가치외교를 계속 고수할 경우 북러 밀착을 가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고, 그렇다고 노선을 변경하자니 동맹국 관계가 신경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일단 정부는 러시아와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국가들과 외교 접점을 넓히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 일종의 '우회' 전략이다. 오는 15~16일 스위스에서 열릴 우크라이나 평화회의에 대통령이 아닌 국무조정실장을 단장으로 참석시키기로 했다. 물론 급을 낮춘 공식적 이유는 윤 대통령의 중앙아시아 순방 때문이지만, 러시아의 존재를 일정 부분 감안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윤 대통령이 마침 방문 중인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은 모두 러시아와 긴밀한 국가들이다. 특히, 카자흐스탄은 올해 SCO 정상회의의 개최국이다.
다행히 푸틴 대통령도 한러 관계를 고려, 북한과의 협력수준을 조절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지난 5일(현지시간) 세계 주요 뉴스통신사 대표들과 만나 "분쟁 지역에 대해 한국이 어떠한 무기도 공급하지 않고 있다. 감사하게 생각한다"며 우호적인 메시지를 던졌다. 최근 이석배 전 주러대사는 "북한으로서는 24년 만의 러시아 정상의 방문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북한에 민감한 군사기술을 이전하는 등 비확산체제에서의 리더십 지위를 포기하기는 쉽지 않다"고 내다봤다.
임수석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정례브리핑에서 "한국과 러시아 간 한반도 문제 관련 소통을 긴밀히 유지하고 있다"며 "러시아와 북한 간의 교류와 협력은 관련 안보리 결의를 준수하는 가운데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하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