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과학을 외면할 때

입력
2024.06.09 16: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중국과의 패권 경쟁에서 미국이 강조하는 논리가 ‘규범에 의한 국제질서’다. 국제사회의 정해진 룰을 따라야 한다는 것인데, 막상 그 규범을 가장 많이 어긴 건 미국이다. 1971년 돌연 미국 달러의 금태환을 중단했고, 2007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는 GM과 포드에 대규모 구제금융을 퍼부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는 자유무역의 상징인 세계무역기구(WTO)를 형해화하고 극단적 보호무역에 나섰고, 파리협정에서 탈퇴해 국제사회의 기후변화 대응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재집권 가능성에 전 세계가 두려움 속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도 미국이 국제사회의 ‘룰 세터’(rule setter)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천조국’(千兆國)이라고 불릴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과 달러 패권을 가진 나라다. 합리성을 떠나 힘의 논리로 미국이 '국제 규범'이라는 걸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바꿔도 국제사회는 속수무책이다. 한국을 포함해 서방 진영은 물론이고 중국이나 러시아도 따라야 하는 형편이다.

□‘룰 세터’ 미국의 궤도이탈을 우려한 사람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었다. 2016년 5월 트럼프의 집권을 우려하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럿거스대 졸업식 초청 연설에서 “정치와 삶에 있어서 무식은 미덕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명백한 진실을 거부하고, 논리와 과학을 외면하는 건 쇠락으로 가는 길”이라고도 지적했다. 국정의 전 분야에서 전문가 조언을 무시한 채 정치 논리가 과학을 넘을 때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였다.

□오바마의 경고는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도 정치 논리가 과학을 넘은 지 오래다. 아직도 피해가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일본 ‘원전 오염수’ 방류부터 사드 전자파,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감염 우려 등이 그런 사례다. 최근의 동해 유전 논란도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직접 발표할 이슈였는지, 국면 전환을 위한 꼼수라는 비판은 가능하지만, 탐사 자체의 합리성까지 의심하는 건 무리다. 외국 인력의 전문성이 나름 확인됐고, 유전 개발의 ‘고위험-고수익’ 속성상 시추 전에는 확률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 세금 낭비라는 비판은 시추공이 텅 빈 걸 확인한 뒤에도 늦지 않다.

조철환 오피니언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