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해도 혼인무효 가능" 판례 변경... '이혼 경력자' 아닌 '싱글' 대접

입력
2024.05.23 17:48
1면
대법원 전원합의체 40년만에 변경
혼인무효와 이혼의 법적 효과 고려

이미 이혼으로 혼인 관계가 해소됐다 해도, 사후에 혼인무효 여부를 따져볼 수 있어야 한다는 대법원 전원합의체(대법원장 포함 대법관 13명으로 구성되는 재판부) 판단이 나왔다. 이혼 후에 혼인을 무효로 처리해봐야 실익이 없을 수 있지만, 혼인무효가 되면 이혼과 달리 법적으로 아예 결혼하지 않은 '싱글'로 돌아갈 수 있다. 이렇게 혼인무효와 이혼의 효과가 다르다는 점을 고려, 대법원은 40년간 유지했던 기존 판례를 변경했다.

23일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노태악 대법관)는 A씨가 전 남편인 B씨를 상대로 혼인무효 확인 등을 청구한 사건 상고심에서, 관여 대법관 만장일치로 원심을 파기자판하고 서울가정법원(1심)으로 환송했다.

파기자판은 원심 판단에 잘못이 있을 때 대법원이 직접 원심을 깨고 판결하는 절차이다. 이 사건은 1심에서 각하돼 2심에서 유지됐는데, 사건이 원심(2심)으로 파기환송되더라도 1심으로 보내질 것이 명백해 대법원이 바로 사건을 1심 법원으로 보낸 것이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혼인관계가 이미 해소된 이후라도 혼인 무효 확인을 구할 이익이 인정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치된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A씨는 2001년 12월 B씨와 혼인신고를 한 법률상 부부였지만, 2004년 10월 이혼조정 성립을 통해 이혼신고를 마쳤다. 하지만 A씨는 뒤늦게 2019년 "혼인의 의사를 결정할 수 없는 극도의 혼란과 불안, 강박 상태에서 혼인에 관한 합의 없이 혼인신고를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주된 청구로 혼인무효 확인을, 예비적으로 혼인취소를 청구했다. 혼인무효는 애초 혼인이 없었던 것으로 돌리는 것을 말하고, 혼인취소는 혼인 이전의 사유로 결혼 관계를 해소하는 것이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혼인 기록 때문에) 미혼모 가족을 위한 다양한 지원 사업의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했다.

1·2심에선 A씨의 혼인무효와 혼인취소 모두 인정 받지 못했다. 1984년 대법원 판례 때문이었다. 40년 전 대법원은 "이혼으로 해소된 혼인관계의 무효 확인은 과거 법률관계에 대한 확인이라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혼한 것이 호적에 기재돼 있어 불명예스럽다는 건 청구인의 현재 법률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송의 이익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대법원은 "혼인무효는 혼인관계를 전제로 해 형성되는 여러 법률관계에 관련된 분쟁을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유효·적절한 수단"이라며 1984년 판례를 변경했다. 법적 효과 차원에서 혼인무효와 이혼은 다르다. 혼인 무효 판단을 받으면 △민법상 인척 간 혼인 금지 규정 △형법상 친족상도례(친족 간의 범죄를 면제·감면하는 특례) △민법상 일상가사채무에 대한 연대책임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 이혼이 아닌 혼인무효를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목적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대법원 관계자는 "이혼 후 혼인무효 확인 청구에 대해 포괄적 법률분쟁을 일거에 해결하는 수단으로 필요성을 인정한 판례"라면서 "국민의 법률생활과 관련된 분쟁을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당사자의 권리 구제방법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근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