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운전자 바꿔치기', 원인은 '솜방망이 처벌'

입력
2024.05.22 04:30
10면
'바꿔치기' 판결문 31건 분석해 보니
가해자 18명, 음주·무면허 사고 전과 
동종 범죄 반복해도... 집행유예 고작

단순 음주운전으로 끝날 수도 있었던 가수 김호중(33)의 ‘음주 뺑소니’ 논란을 키운 건 사건 은폐 시도였다. 그의 매니저는 경찰서를 찾아 본인이 운전했다고 허위자수했으나, 경찰의 추궁 끝에 범행이 까발려졌다.

김씨 사건이 특별한 건 아니다. 이런 ‘운전자 바꿔치기’는 교통사고나 단속 현장에서 종종 일어난다. 21일 한국일보가 최근 1년간 관련 법원 판결문 31건을 확인해보니, 뻔뻔한 범죄 은폐가 활개 치는 데는 ‘솜방망이 처벌’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은폐 시도에도... 절반이 '집행유예'

판결문 속 가해자 대부분은 무면허로 운전대를 잡거나 만취 상태에서 운전자 바꿔치기를 시도했다. 특히 음주운전 사례 9건에서 운전자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 취소(0.08% 이상) 수준을 웃돌았다. 사고 발생 직후 현장에서 동승자를 운전자로 내세우기도 하고, 김호중처럼 일단 도주한 뒤 배우자나 지인에게 ‘자진 출두’를 부탁했다.

교통 전과도 원인이 됐다. 피의자 31명 중 무려 18명이 교통 범죄 재발에 따른 불이익을 걱정해 범행을 숨기려 했다. 예컨대 2023년 1월 전남 여수시에서 40대 피해자에게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히고 도주한 후 아내가 허위 진술하게 한 A씨는 이미 수차례 음주·무면허 운전 처벌 전력에 면허를 박탈당한 상황이었다. 같은 해 3월 광주에서 음주운전 집행유예 기간 중 무면허 상태로 교통사고를 낸 B씨도 집행유예 실효를 우려해 배우자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 이 사고로 16세 청소년이 목숨을 잃었다.

직업도 중요한 동기였다. 특히 택시, 운수업 등 운전업무 종사자가 8명이었는데, 이들은 생계가 끊길 두려움에 범행했다고 진술했다. 또 운전자가 공무원 신분이거나 김호중처럼 인지도가 높은 연예인일 경우 바꿔치기가 빈번했다. 가수 이루와 래퍼 장용준이 그런 사례다.

무엇보다 바꿔치기 유혹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미미한 처벌에 있다. 31건 중 15건(약 48%)에서 집행유예 판결이 나왔다. 법조계에선 이를 범죄자가 타인으로 하여금 허위 자백 등을 하도록 부추기는 ‘범인도피교사죄’의 일종으로 보고 있지만, 은폐 행위가 인정돼 실형으로 이어지는 사건은 많지 않다.

심지어 같은 범죄를 반복해도 처벌은 약했다. 앞서 음주·무면허 운전이 수차례 적발됐으나 쭉 벌금형의 선처를 받아온 A씨는 또다시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교통사고 전문 윤원섭 변호사는 “재판부가 계획범죄가 아니라, 처벌을 모면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행동한 정황으로 본 것”이라고 설명했다.

블랙박스 회수 아직... 김호중, 첫 조사

하지만 운전자 바꿔치기는 수사에 혼선을 줄 수 있는 데다, 범행에 상응하는 처벌을 방해하는 만큼 엄하게 다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한 경찰 관계자는 “김호중 사건에서 보듯, 운전자를 오인하면 혈중알코올농도 등 증거 확인이 늦어져 혐의 입증이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원석 검찰총장도 20일 바꿔치기를 콕 집어 언급하며 사법방해 행위에 엄정 대응하라고 일선 검찰청에 지시했다.

김호중은 이날 오후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 강남경찰서에 출석해 조사를 받았다. 음주운전 사실을 인정한 후 첫 경찰 출석이다. 경찰은 김호중과 소속사 관계자 등 4명을 출국금지 조치하고, 소속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는 등 그의 음주운전 혐의 입증에 주력하고 있다. 아직 사건 당일 김호중이 이용한 차량 3대의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는 확보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확보한 증거물을 토대로 소속사 관계자들의 사고 전후 행적 등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유진 기자
이서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