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네임 '문로드'…'문재인-김정은' 정상회담 위해 국정원, 은밀히 움직였다

입력
2024.05.18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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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 출범 직후 서훈-김영철 라인 가동
김여정 방남, 남북 '번개' 회담 이끌어
하노이 노딜 볼턴·폼페이오 책임
"남북연락사무소 폭파는 사과받아야"
"김정은, 남북연락사무소 복원 제안해"

문재인 전 대통령이 '서훈-김영철' 정보라인을 중심으로 남북 간 대화를 복원하고, 양측 정상회담까지 은밀히 추진했던 사실을 공개했다. 이른바 코드네임 '문 로드'다.

문 전 대통령은 17일 퇴임 2주년을 맞아 출간한 회고록 '변방에서 중심으로'(김영사)에서 2017년 5월부터 2022년 5월까지 펼쳐졌던 외교 비화를 공개했다. 최종건 전 외교부 차관과의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회고록에는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부터 서훈 국가정보원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을 중심으로 한 양측 정보라인 간 소통과 물밑 협상 과정이 구체적으로 담겼다.

코드네임 '문 로드,' 남북대화의 창구 열다

문 전 대통령은 '서훈-김영철' 소통채널이 남북대화와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시작을 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했다. 이른바 '문 로드' 채널 덕에 북측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와 남북대화 복원이 가능했다는 것이다. 실제 북측은 이 라인을 통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의 방남 계획도 밝혔다고 한다.

다만 문 전 대통령은 정보채널을 공식 대화를 위한 보조로 역할을 한정하려 했다고 덧붙였다. 과거 대북송금 사태처럼 비공식채널에서 남북 간 합의가 이뤄질 경우 외교·안보적 파장을 피할 수 없다는 교훈 때문이다. 실제 문 전 대통령은 김 위원장과 직접 38차례나 친서를 교환하면서 남북·남북미 대화 모멘텀을 이어나갔다고 했다.

'문 로드' 채널은 2018년 5월 26일 남북 정상회담 성사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당시 존 볼턴 미 국가안보보좌관의 '리비아 비핵화 모델'에 북한이 반발, 막말성 담화를 잇따라 발표하자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취소를 통보한 상황이었다. 이후 5월 25일 오전 김 통전부장이 서 원장에게 긴급히 만나자는 요청을 해왔고, 그날 오후 3시 판문점 북측 지역에서 두 사람은 소위 '번개 만남'을 가졌다. 문 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을 되살리려면 시간 여유가 없었다"며 "번개팅처럼 남북이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비핵화·비핵화·비핵화… 남북대화 속 숨겨진 '카드'

문 전 대통령은 남북대화의 지속성을 위해 북측과 비핵화에 대한 논의를 계속했다고 강조했다. 김 위원장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대북제재에 대한 고충을 토로하며 문 전 대통령에게 자문을 구했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시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상징하는 '도보다리' 대화를 그 예로 꼽았다.

문 전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이 본격 대화까지 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우리가 주도해달라고 당부했듯, 북한도 초기 과정에서는 우리를 메신저로 활용해 자신들의 뜻을 미국에 전하려 했다"며 "(도보다리에선) 김 위원장이 주로 질문하고 내가 조언하는 식으로 대화가 많이 진행됐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도 남북정상 합의문에 없었던 내용이었는데 김 위원장이 제안을 한 것"이라며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고 평가했다. 북한은 회담 이후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쇄했다. 문 전 대통령은 당시 김 위원장에게 전달한 이동형 저장장치(USB)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2018년 9월 남북 평양공동선언에 영변 핵시설 조건부 폐쇄 조항이 삽입된 배경도 공개됐다. 문 전 대통령은 해당 사안은 우리 특사단이 평양회담 준비를 위해 사전 방문했을 때 김 위원장이 먼저 밝혔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영변 핵단지 폐기를 남북 간에 합의한 것은 굉장히 이례적이고 특별한 일"이었다고 평가했다.

"하노이 노딜, 볼턴·폼페이오 책임… 연락사무소 폭파는 사과받아야"

문 전 대통령은 '노 딜(No deal)'로 끝난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배후로 볼턴 보좌관과 마이크 폼페이오 당시 국무장관을 지목했다. 당시 중앙정보부(CIA) 국장이었던 폼페이오 장관이 하노이 정상회담 전 평양 협상에서 '종전선언과 북한의 핵리스트 맞교환'이라는 굴욕적인 제안을 북한에 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북미 간 실무협상에서 진전을 보지 못했다"는 게 문 전 대통령의 주장이다. 이후 북한은 북미 대화가 미지근하자 2020년 6월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당시 복수의 정보 소식통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면 미국이 제재 해제를 해줄 것'이라는 국정원의 말만 믿고 하노이를 갔던 김 위원장이 체면을 구기게 되자 격분해서 한 조치"라고 전한 바 있다.

"김정은이 남북사무소 복원 관련 협의를 제안했다"

문 전 대통령은 이와 관련, "연락사무소는 남북 화해와 협력,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상징적 존재였기 때문에 폭파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이어 "지금까지의 노력을 허탈하게 만드는 극단적 조치"로 "언젠가 반드시 사과받아야 할 일"이라고 강조했다.

문 전 대통령은 그러나 북한이 사무소 복원을 제안한 사실도 털어놨다. 2021년 5월쯤 김 위원장이 친서로 "남북연락사무소를 군사분계선 일대에 다시 건설하는 문제를 협의해보자"고 제안했다는 것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문 전 대통령은 최근 '핵고도화'에 매달리는 김 위원장의 행보에 대해 "결코 북한 인민들이나 그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길이 아니다"라며 "남북 모두가 더 이상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멈추고, 대화를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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