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중 사망 치킨집 주인... '명의만 사장'이라면 근로자로 봐야

입력
2024.05.06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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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 근로자만 해당되는 산업재해 인정
업체·계좌 명의만 제공.... 실제 종속관계
"계약 말고 근로 제공관계 실질 따져야"

명의만 사업주일 뿐 실제 지분을 소유하지 않고 운영에도 관여하지 않은 이른바 '바지사장'이었다면, 그를 근로자로 인정해 업무상 재해에 따른 보상을 제공해야 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근무 환경과 조건, 전후 사정 등을 두루 고려해 근로기준법상 근로자에 해당하는지를 결정해야 한다는 취지다.

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부장 이주영)는 치킨 배달을 하다 사망한 A(당시 26)씨의 유족들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 소송에서 지난달 18일 원고 승소 판결했다. 유족급여는 근로자가 산업재해로 숨졌을 때 그 유족에게 지급되는 연금 또는 일시금이다.

쟁점은 명의상 치킨집 사장이던 A씨를 근로자로 볼 수 있는지였다. A씨는 2021년 8월 오토바이를 타고 배달하던 중, 주차된 기중기를 들이받고 숨졌다. 유족들은 공단에 유족급여 및 장례비 지급을 청구했지만, 공단은 "A씨를 근로자로 볼 수 없다"며 기각했다. 치킨집도, 업체 계좌도 모두 A씨 명의로 돼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산재보험은 '근로자'의 재해를 보상하는 보험이다.

그러나 법원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근로자가 맞는지 따질 땐, 단순한 계약 형식이 아닌 △업무 내용을 사용자가 정하고 근로자가 취업규칙 등을 적용 받는지 △사용자가 근무시간과 장소를 지정하고 근로자가 구속받는지 등을 꼼꼼히 따져야 한다는 판례를 근거로 들었다.

A씨는 2020년 동호회에서 만난 B씨의 제안으로 치킨집을 시작했다. 당시 B씨는 다른 직장을 다니고 있어서, A씨 명의를 빌려야 했다. 점포 보증금과 임대료도 전부 B씨가 부담했다. 계좌는 A씨 이름으로 되어 있었지만, 관리는 B씨가 했다. 계좌 내역상 사업장 계좌와 B씨 통장 사이에 돈이 오간 기록이 훨씬 많았다. 휴무일, 영업시간, 근무시간, 자금조달 등의 주도권이 B씨에게 있었다는 점도 근거가 됐다. A씨 사망 이후 점포 명의는 B씨 배우자로 변경됐다.

재판부는 이러한 사정들을 종합해 "실제 사업자는 B씨이고, A씨는 임금을 목적으로 (B씨와) 종속적인 관계에서 근로를 제공한 근로자에 해당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결론 내렸다. 치킨집을 열 때 A씨가 요식업 경력이 없는 만 26세에 불과했다는 점을 들어, A씨가 공동사업자(동업자) 지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B씨 증언 등에 따르면 창업한 지 얼마 안 돼 매출과 이윤이 불안정해 필요 비용을 먼저 지출한 후 불규칙적으로 A씨에게 급여를 지급했다"면서 "대가의 불규칙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자가 아니라고는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근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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