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분만 10건 안 돼도… "여기를 지켜야" 산모 기다리는 의사

입력
2024.05.10 04:00
8면
[산모가 또 죽었다: 고위험 임신의 경고]
분만 취약지 1호 영동병원 황해붕 과장
분만 건수 2013년 109건→2023년 5건
소파술 중단하자 분만으론 운영 안 돼
피부과·검진병원 차렸다 다시 분만의사
"자부심 컸는데… 안전한 출산에 관심을"

편집자주

11년간 아기를 낳다가 사망한 산모는 389명. 만혼·노산·시험관·식습관 변화로 고위험 임신 비중은 늘고 있지만, 분만 인프라는 무너지고 있습니다. 한국일보 엑설런스랩은 100일 동안 모성사망 유족 13명, 산과 의료진 55명의 이야기를 통해 산모들의 안타까운 사연과 붕괴가 시작된 의료 현장을 살펴보고 안전한 출산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도 고민했습니다.


"옛날엔 다들 잘나갔는데… 친구들도 아직 현업에 한두 명 있는데, 그냥 앉아 있는 거야. 폼으로. 나는 어떻냐고? 과소 업무야. 환자가 안 와."

충북 영동병원 산부인과 전문의 황해붕 과장은 올해로 72세다. 기자에게 업무가 적다고 장난기 있게 말했지만, 지금까지 그의 손을 거쳐 태어난 아이만 8,000명이 넘는다. 그는 산부인과 의사로서 어쩌면 종착지가 될 영동에서 13년째 근무하고 있다.

보건복지부는 2011년 분만 취약지 지원사업 1호로 영동병원을 선정했다. 벚꽃 지는 순서대로 분만병원이 문을 닫자 정부가 부랴부랴 시작한 사업이다. 이 병원은 사업 선정 첫해에 정부에서 12억5,000만 원을 지원받아 분만 시설과 장비를 갖췄다. 이후 매년 5억 원씩 지원받아 의료진 인건비를 충당하고 있다.

분만 실적은 저출생과 지방소멸의 현실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문을 연 첫해 24건을 시작으로 2013년에는 109건까지 찍더니 이후 내리막길을 걸었다. 2018년 23건을 끝으로 이후에는 매년 10건을 넘지 못하고 있다. 영동지역 출생아가 2011년 296명에서 2022년 130명(합계출산율 1.0명)으로 급감한 데다 산모들이 인근 대전이나 김천으로 가서 출산한 영향도 있다.

황 과장은 그럼에도 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병원마저 출산을 접으면 영동에 분만 가능한 병원은 한 곳도 없기 때문이다. 1년에 화재가 10건 미만 발생하는 산골 지역에까지 소방서를 두는 이유와 비슷하다. 업무가 많고 적음을 떠나서, 긴급 상황 발생 시 신속하게 대응할 곳이 지근거리에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황 과장이 산과(産科) 의사로서 걸어온 길은 굴곡진 우리나라 분만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돌고 돌아 분만 병원에 다시 자리 잡은 황 과장은 눈 잘 보이고 실밥 꿰맬 수 있을 때까지 분만을 받고 싶어 한다. 길게 보면 5년 남았다.


①1984~1991년 / 베이비부머의 넘쳐나는 분만

충남대 의대를 졸업한 그는 1984년 강북삼성병원에서 산부인과 전공의를 수료했다. 군대 다녀오고 주변에서 산부인과가 돈 벌기 좋다길래 산과를 선택했다. 그땐 베이비부머 세대가 한창 출산할 때라 분만이 쉴 틈 없이 이어졌다. 전공의 수료 후 곧바로 대전으로 내려와 그의 이름을 내건 병원을 열었다. 황해붕산부인과. 1984년 대전 시내에서 연 23번째 산부인과였다. 당시엔 수련병원마다 매년 산부인과 전공의가 3~5명씩 나왔고, 분만병원도 우후죽순 생겨났다.

②1991~2001년 / 소파술 중단과 수입 급감

경비 절감과 당직 문제 해결을 위해 마음 맞는 동료와 분만병원을 개업했다. 이름은 이화산부인과. 황 과장 기억에 이때가 가장 바빴던 것 같다. 아이 낳겠다는 산모들이 많아서 대전에서 세 번째로 큰 분만병원으로 성장했다. 당시 대기업 직원의 평균 연봉보다 3, 4배 넘게 벌었다.

변곡점은 2000년이었다. 산모가 줄어드는 게 피부로 느껴졌다. 동업 청산을 고려한 것도 이때부터다. 결정적 이유는 황 과장이 임신중절술(소파술) 중단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그는 독실한 교인이었고 소파술에 회의감이 많았다. 환자를 마취했다가 사망할 뻔한 사고까지 발생하자, 다시는 소파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나님께 맹세했다.

소파술을 그만하자 당장 먹고사는 게 문제였다. 당시 소파술은 3만 원, 분만은 1만8,000원을 받았다. 소파술은 5분이면 끝나지만, 분만은 반나절 넘게 걸렸다. 수입 구조가 기형적이었다. 분만으로 벌어들인 돈은 병원 유지비 수준이었다. 석 달 동안 아내에게 돈을 주지 못했다. 동료 원장에게도 이기적으로 구는 것 같아 미안했다.

③2001~2004년 / 분만을 접다

황 과장은 동업을 접고 독립해 산부인과를 꾸렸다. 3년간은 어떻게든 버텼다. 그러나 소파술을 그만두니까 좀처럼 수입이 나아지지 않았다. 산모도 급감했고, 분만 수가도 턱없이 낮았다. 결국 그는 20년간 업으로 삼았던 분만을 접기로 했다. 생활 앞에 의술은 무력했다.

④2004~2011년 / 피부과와 검진센터까지

황 과장도 대세에 따라 피부미용에 뛰어들었다. 친구였던 아주대병원 피부과 주임교수는 "분만을 그만두겠다"고 하니까 피부과 시술을 권했다. 6개월을 배워 대전에서 처음으로 필러와 보톡스를 시작한 산부인과 전문의가 됐다. 병원명도 이화의원으로 바꿨고, 진료 과목에 피부과도 넣었다.

수입은 괜찮았지만 과잉경쟁이 문제였다. 대전 일대에 레이저 시술을 안 하는 병원이 없을 정도로 경쟁이 치열했다. 처음엔 '물광' 시술 한 건에 10만 원 받았는데, 인근 병원은 2만 원까지 내렸다.

결국 피부과 문을 닫고 검진센터(2010년 9월~2011년 7월)를 열었다. 5대 암(위암, 간암, 대장암, 유방암, 자궁경부암)을 검진하면 수입이 괜찮을 것 같았다. 그런데 검진을 하면 할수록 손해였다. 황 과장은 자궁경부암만 진단할 수 있었고, 다른 검진은 다른 병원에 의뢰해야 했다. 외주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이쯤 하면 의사 오래 했다 싶어서 검진센터도 문을 닫았다.


2011년 7월~ 현재 / 산모 오지 않는 산부인과

일복이 많은 건지, 후배가 영동병원 산부인과에서 일해보라고 추천했다. 정부의 분만 취약지 지원사업 대상 1호 병원이었다. 여생을 봉사하며 살자는 마음도 있었고, 놀면 뭐 하나 싶었다.

영동에 분만병원이 생기니 처음엔 산모들이 많이 와서 진료도 받고, 출산도 했다. 그러나 해를 거듭할수록 산모들은 오지 않았다. 그나마 결혼이주여성이 대부분이고 한국인 산모는 간단한 진료만 받고 갔다. 실제로 영동의 관내 분만율(영동 사람이 관내에서 아기를 낳는 비율)은 사업 세 번째 해인 2013년 48.2%까지 올랐지만 2023년엔 4.8%로 급락했다. 대부분 가까운 대도시인 대전에 애를 낳으러 갔다.

황 과장은 "산모들이 이 병원을 신뢰하지 않는 것 같다"고 했다. 소아과 공보의가 산부인과 개설 3년 후 그만뒀던 게 결정적이었다. 마취과 전문의가 있지만 오후 5시에 퇴근하기에 저녁에 응급제왕절개 수술도 사실상 불가능했다. 산모들 입장에선 아이를 낳아도 진료할 소아과 의사가 없고, 응급 수술까지 불가능하니 기피할 수밖에 없었다.

아찔했던 순간도 있었다. 2021년 여름, 산전 진찰을 받던 산모가 분만을 앞두고 병원을 찾아왔다. 저녁 7~8시쯤 아기가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오후 3시쯤 입원시켰다. 실제로 7시쯤 아기 문이 열렸지만, 아기는 나올 생각을 안 했다. 밤 10시가 돼도 마찬가지였다. 1시간 내 나오지 않으면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 했다. 문제는 마취과 의사가 퇴근해 병원에 없었다는 점이다. 황 과장은 급한 대로 대전의 큰 분만병원에 있는 후배에게 연락해 수술을 준비해달라고 부탁했다. 다행히 빨리 오라는 답을 받자, 황 과장은 산모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시속 180㎞로 달려 대전 병원으로 갔다. 당시 구급차에서 산모의 손을 꼭 붙잡고 무사하길 빌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생각해봐요. 이런 일이 여러 차례 발생하면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저 병원은 안 돼' 이런 인식이 생깁니다. 나도 굉장히 답답하지만 밖에서 볼 때 우리 병원을 어떻게 보겠냐는 거죠."


40년 산과 의사 "힘들지만 보람 있어"

황 과장은 자신이 영동병원을 그만두더라도 50대 후배들이 자리를 채울 거라고 했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40대 산과 의사가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라 향후 병원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이다.

황 과장은 소중한 생명이 태어날 때 현장에 있었다면 자부심을 가져도 될 일이라고 했다. 나라의 근간은 사람이고, 그 사람을 세상과 이어주는 게 산과 의사의 일이기 때문이다. 산과를 고민하는 후배 의사들에게 40년 분만 현장에 있었던 선배가 해주는 조언이었다.

"물론 굉장히 힘들죠. 사고 부담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게 없이는 뿌듯함도 생길 수 없죠. 생명을 살리는 첫 관문이 아기를 받는 거잖아요. 돌이켜보면 가장 보람 있는 일이었습니다. 정부도 '안전한 출산'에 좀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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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별로 읽어보세요

  1. ① <1> 위기 : 놓쳐버린 생명
    1. • 대학병원 옮기는 데 10시간··· 서른셋 산모, 둘째 낳고 하늘나라로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202480002162)
    2. • 35세 이상 산모 급증하는데… 전문 의료진 감소·협진 붕괴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3014400003480)
    3. • 1.8㎏ 둘째 낳고 떠난 아내… 남편도 의사도 함께 울었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2402220004157)
    4. • 고위험 산모와 이들을 지키는 사람들(Feat. 박은영 방송인)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423580002110)
  2. ② <2> 긴급 : 예고 없는 그림자
    1. • 산모도 아기도 건강했는데… 해장국 먹고왔더니 아내가 쓰러졌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614270000511)
    2. • [모성사망 아카이브] 돌아오지 못한 산모들, 13개의 비극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112300000628)
  3. ③ <3> 붕괴 : 포기하는 이유
    1. • "집에서 아이 낳을 판…" 고위험 산모 책임질 의료진 씨가 마른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2814400003397)
    2. • "아기 살렸는데 12억 배상이라니…" 소송 공포에 분만 포기하는 의사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43013430004721)
  4. ④ <4> 암울: 분만병원의 미래
    1. • 1년에 분만 10건 안 돼도… "여기를 지켜야" 산모 기다리는 의사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208040005970)
    2. • "여기선 못 낳아" 정부 지원에도 분만 취약지 병원 외면 받는 이유는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511200004849)
  5. ⑤ <5> 산후 : 살아남은 사람들
    1. • 피 쏟고 혈압 치솟아도… 생사 고비 넘어 아기 지켜낸 엄마들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216540003277)
    2. • 죽을 뻔한 산모 살려낸 의료진이 소방서 언급한 이유는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715570001763)
    3. • 설마 내가 고위험 임신? 자가진단 해보세요
      (www.hankookilbo.com/News/Read/A2024050917390003471)


영동= 이성원 기자
박준석 기자
송주용 기자
한채연 인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