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세상 배부를 때 꽃이 지려나

입력
2024.05.02 04: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거리에 온통 하얀 쌀이다. 나뭇가지마다 소복하다. 휙, 한줄기 따뜻한 바람에 쌀이 쏟아져 내린다. 길 옆 평상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하던 어르신들이 떨어진 쌀을 모아 고봉밥을 짓는다. 보릿고개를 겪은 어르신들에게 이팝나무 꽃은 여전히 윤기 흐르는 흰쌀밥으로 보일 게다. 젊은 날 주린 배를 잡고 농사짓던 이야기를 하는지, 흉년이 들었던 해 엄마의 빈 젖을 빨다 굶어 죽은 이웃집 아기 얘기를 하는지 연신 눈물을 훔친다.

올해 이팝나무 꽃은 유난히 희고 풍성하다. 그래서일까. 온 동네에 은은한 밥 향이 퍼진다. 중간고사가 끝났는지 깔깔대던 여고생들이 “팝콘” 같다며 먹는 시늉을 낸다. 먹을 게 풍족해 밥이 귀하지 않은 시절이니, 아이들에겐 흰쌀밥보다 달콤한 팝콘이 먼저 떠오를 만도 하다.

꽃이 흐드러진 이팝나무 가로수 길에 서면 5·18 묘지 가는 길이 떠올라 슬프다. 대학 시절 처음 갔던 그곳엔 이팝나무가 없었다. 10년쯤 지나 다시 갔던 날, 한없이 긴 꽃 터널을 보며 북받쳐 울었다. 흰 꽃을 머리에 인 키 큰 나무들이 마치 소복을 입은 사람들 같아서였다. 광주에 사는 이가 말해줬다. 그곳의 이팝나무는 5·18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라고. 타지 사람도 이럴진대 광주 시민들은 이팝나무에 꽃이 핀 5월 내내 온몸으로 울겠다.

사연을 가득 안은 이팝은 어떤 말에서 시작됐을까. 학계에서는 니밥→이밥→이팝으로 본다. 이밥은 쌀밥이다. 니밥의 ‘니’는 쌀의 옛말. 니밥이 두음법칙에 따라 이밥으로 바뀌었다. ‘니’가 낯설다면 끼니를 떠올려 보시라. 끼니는 아침 점심 저녁 일정한 시간에 먹는 밥을 말한다. 밥뿐 아니라 그렇게 먹는 일도 끼니라고 한다. ‘끼’는 ‘때’를 말한다.

나무에 꽃이 피는 시기와 관련된 설도 있다. 입하(立夏) 머리에 꽃이 피어 입하목이라고 불렀단다. 입하가 연음돼 이파가 됐다가 다시 이팝으로 바뀌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전라도 일부 지역에선 이팝나무를 입하목, 이암나무라고도 부른다.

조(좁쌀)밥을 닮은 조팝나무 이야기도 잠깐 해야겠다. 오곡 중 하나인 조는 낟알이 들깨만 하다. 꽃이 기름에 튀긴 좁쌀 같아서 조팝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그럴싸한 말이다. 꽃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터져서 드러난 흰 속살 위로 노란빛이 반짝인다.

배가 고프지 않아도 이팝나무 꽃을 보면 영락없이 고봉밥이다. 나이 지긋한 농부들은 이팝나무에 꽃이 흐드러지면 벼농사가 잘된다고 믿는다. 이래저래 이팝은 먹는 것과 관련이 깊다. 온 세상이 배부를 때까지, 누군가의 가슴에 맺힌 한이 풀릴 때까지 쌀나무 꽃은 지지 않을 것이다.





노경아 교열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