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 아이는 자주 “내가 어떤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라고 내게 묻는다. 아이가 말하는 것의 의미는 “과연 내가 출퇴근하는 직업을 가질 수 있을까?”이다.
우선 출퇴근에 물리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모될 것이란 예상을 해볼 수 있다. 주변에서 휠체어로 출퇴근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파란만장하다. 혼잡시간을 피해 새벽에 나오는 건 기본이다. 어떤 휠체어 이용자는 대중교통으로 도저히 시간을 맞추기 어렵다는 걸 깨닫고 결국 면허를 따고 차를 샀다. 운전이 어려운 어떤 휠체어 이용자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장애인 콜택시를 부르며 ‘오늘은 제 시간에 오기를’ 기도한다. 어떤 휠체어 이용자는 혼잡한 역을 피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그는 두세 역전에 내려서 휠체어로 달려간다.
이렇게 절대 시간의 소모를 제외하고 다른 문제는 없을까? 우선 휠체어를 타는 아이가 혼잡시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휠체어를 타고 그 공간에 비집고 들어갈 수 있을까? 휠체어를 이용하는 어떤 작가님의 말마따나 “생명의 위협이 느껴지는” 일이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 출퇴근 승객들에게 양보를 기대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장애 당사자들이 일상생활을 하는데 써야 하는 ‘소통 에너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얼마 전 지인 모임에서 휠체어를 탄 지인이 약속 시간보다 15분 일찍 도착했다. 일찍 왔다고 했더니 그는 한참 주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45분 늦었어요.” 이야기를 들어보니 예전에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넉넉하게 시간을 두고 지하철을 이용했는데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우회하여 가느라 40분이 더 걸렸단다. 그런 불확실성을 또 겪을 순 없어서 이번엔 아예 장애인 콜택시를 몇 시간 전에 불렀는데 자신이 생각했던 도착시간보다는 늦었단다.
그가 그 이야기를 할 때 주저했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왜 그랬을까. 그에게는 ‘푸념처럼 들리진 않을까’란 생각과 ‘이게 내 일상인데 굳이 말할 필요가 있을까’란 생각이 잠시 스쳤을 수도 있다. 즉 이런 말을 할 때 상대방이 어떻게 느낄까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순간 시뮬레이션을 빠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미 제 시간에 오기 위해 비장애인에 비해 3배는 더 계획해야 하고 5배는 더 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했어야 했다.
며칠 전 딸아이와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아이는 자신이 입고 싶은 옷을 자신의 손이 닿지 않는 옷장 안에 걸어놨다며 짜증을 냈다. “엄마가 꺼내 줄 수 있으니 거기에 걸어놨다”는 말에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이런 사소한 도움을 받기 위해 엄마를 굳이 부르고 싶지 않아.” “밖에서 돌아다닐 때는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 잘 요청한다며?” “그러니까 집에서는 이런 것까지 도움받기는 싫다고.”
머릿속에 전등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휠체어를 타는 딸아이는 바깥에서 턱 한두 개가 있는 곳에 들어갈 때는 주변에 ‘좀 도와주세요’라고 요청한다. 도움을 받기 위해 요청을 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굳이 설명해야 할 때도 소통 에너지가 많이 소모된다. 즉 낯선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려면 에너지를 아껴야 하니 집에서는 굳이 그 에너지까지 쓰지 않게 해달라는 것이다.
중증장애인일수록 소통 에너지를 잘 배분하는 게 쉽지 않다. 화장실에 가거나 샤워를 하는 등의 신변처리 도움이 필요한 중증장애인들에게 물어보면 처음 만나는 활동 지원인에게 신변처리를 부탁하고 그와 호흡을 맞추는 데 상당한 소통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장애 정도가 심해서 하루에 2명 이상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경우에는 감정에너지 소모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사회생활에는 소통 에너지가 필수적이다. 몇 년 후면 사회생활을 하게 될 딸아이가 밖에서 더 용기 있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도록 집 안에서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것들은 최대한 혼자 할 수 있게 환경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바깥 환경도 마찬가지다. 이동 약자들이 과연 정시출근을 매일 할수 있을지 걱정할 필요가 없는 환경. 지하철 엘리베이터 고장을 외출 전부터 미리 걱정하지 않도록 역마다 엘리베이터가 한 대 더 설치될 수 있는 환경. 굳이 도움벨을 누르지 않고도 경사로나 자동문으로 쉽게 들어가 식사하고 어울릴 수 있는 환경. 그런 환경을 만드는 것이 이동약자를 비롯한 사회 전체의 불필요한 ‘소통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