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팝 아이돌 시장에서 세계관이 자취를 감췄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K팝 아이돌 그룹의 성공 여부는 잘 짜여진 세계관과 서사에 달려있다고 여겨졌던 것과는 180도 달라진 분위기다. 아이돌 그룹들은 거창한 세계관 대신 현실과 대중적 공감에 초점을 둔 노래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과연, K팝 시장 성공의 필수 조건으로 여겨지던 세계관이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K팝 시장에 불어닥친 '세계관' 붐은 3~4세대 아이돌을 중심으로 몸집을 키웠다. 방탄소년단이 위태로운 청춘의 단면과 성장 서사에 기반한 세계관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큰 인기를 얻은 것이 K팝 시장 세계관 전쟁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방탄소년단의 성공 사례를 본따 국내 기획사들은 너도 나도 세계관 구축에 열을 올렸고, 3세대 후반부터 4세대 초까지 데뷔한 아이돌 그룹들은 저마다의 서사를 갖춘 세계관으로 글로벌 시장의 문을 두드렸다.
수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세계관은 그룹만의 차별화된 셀링 포인트를 마련함과 동시에 팬덤을 흡수하는 장치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촘촘하게 짜여진 세계관은 단순히 노래를 듣는 재미를 넘어 새로운 흥미 요소를 갖춘 콘텐츠를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유입된 팬들에게 소속감과 유대감, 몰입감을 형성하며 한층 공고한 팬덤을 만들어내는 식이었다. 소속사 입장에서도 세계관을 활용해 다양한 수익 창출을 기대할 수 있는 만큼, 잘 만든 세계관은 열 마케팅보다 강력한 '효자 상품'이었다. 방탄소년단을 기점으로 다수의 4세대 아이돌들이 치열한 세계관 경쟁을 벌인 이유다.
하지만 4세대 중후반을 기점으로 맹렬했던 세계관의 기세는 점점 꺾이기 시작했다. 최근 5세대를 표방하며 데뷔한 아이돌 그룹들에게서는 세계관을 찾아보는 것이 어려워졌을 정도인데다, 앞서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워 활동했던 그룹들도 최근에는 세계관을 강조하기 보다는 각 앨범과 노래의 콘셉트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대표적인 예가 라이즈와 투어스다. 이른바 '5세대'로 불리는 두 그룹은 세계관 대신 자신들만의 색깔과 현실적인 감정을 녹여낸 독자 장르(라이즈의 '이모셔널 팝', 투어스의 '보이후드 팝')으로 차별화를 꾀했다. 최근 데뷔한 아일릿 역시 10대 소녀들의 솔직한 감성에 초점을 맞췄을 뿐, 서사를 부여하는 거창한 세계관은 찾아볼 수 없다.
이같은 변화의 가장 큰 이유는 K팝 시장의 달라진 음악 트렌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2022년 뉴진스가 데뷔 이후 신드롬급 인기를 구가한 것을 기점으로 국내 음악 시장의 트렌드는 점차 '이지 리스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팬덤에 국한되지 않고 대중성까지 확보할 수 있는 이지 리스닝 곡들이 잇따른 성공 사례를 낳으면서 아이돌 그룹의 음악 역시 강렬한 콘셉트 대신 가볍고 편안한 스타일로 변화했다. 음악이 힘을 덜면서 자연스럽게 아이돌 그룹들의 콘셉트 역시 바뀌었다. 강렬한 퍼포먼스, 세계관을 투영한 노래가 트렌드의 중심에서 벗어나면서 이를 기반으로 하는 아이돌 세계관 역시 빠르게 설 자리를 잃었다.
또 다른 문제는 세계관으로 기대만큼의 수익을 창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이다. 한 가요계 관계자는 "잘 짜여진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많은 인력과 시간, 비용이 투입되는 만큼 기획사에서는 이를 통한 수익 창출을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라며 "하지만 현실적으로 세계관과 수익성을 연결하는 것은 어렵다. 세계관을 활용해 수익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웹툰, 소설, 게임, 굿즈 등 다양한 부가 사업과 세계관의 IP를 결합해야 하는데 자체 인프라를 갖춘 대형 기획사가 아닌 이상 세계관을 활용한 부가 사업을 진행하기가 쉽지 않다. 설령 부가 사업을 진행한다 해도 이를 통해 초기 투자 비용에 준하는 수익을 내는 경우도 적은 편"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가요 관계자는 국내외 차트에서의 성적이 중요한 아이돌 시장에서 팬덤을 겨냥한 세계관이 일반 리스너들의 유입을 저해하는 '진입 장벽'이 된다는 점을 언급했다. 해당 관계자는 "국내외 차트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이끌어 내기 위해서는 코어 팬덤 외에도 대중적인 리스너 유입이 필요한데, 복잡한 세계관은 대중에게 진입 장벽으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최근 많은 아이돌 그룹들이 세계관 대신 직관적인 메시지와 콘셉트를 내세우는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