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와 항복의 차이

입력
2024.04.04 17: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윤석열 후보의 부인 김건희 여사와 관련해서는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내용인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 수십 건 보도했습니다. (중략) YTN이 이런 묻지마식 불공정 편파 보도로 국민의 신뢰를 잃어버린 점 정중하게 사과드립니다. YTN을 국민 여러분께 돌려드리겠습니다.” 김백 YTN 사장은 취임하자마자 사과했다. 발생한 문제에 동의(Agree)하고, 사과(Apologize)한 후, 시정 행동(Act)에 나서라는 ‘사과의 3A’를 충실히 따른 사과문이다. 그럼에도 반응이 우호적이지 않다.

□“내가 일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나는 나 자신과 우리 팀에 좌절감을 느낀다. 책임은 나에게 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 2009년 3월 취임한 지 14일 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보건장관 내정자가 탈세 논란으로 사퇴하자 인사 검증 실패를 사과하며 한 말이다. 파격적인 사과에 대선에서 그를 선택하지 않은 국민들의 마음마저 풀렸다. 김 사장의 사과와 오바마 전 대통령의 사과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흔히들 사과를 ‘패배’의 인정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과는 리더가 해야만 긍정적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리더의 언어다. 그래서 잘못이 발생했을 때 신속하고 진정한 사과를 통해 오히려 리더십이 더 강해지는 사례가 적지 않다. 젊은 신임 대통령 오바마는 진솔한 사과를 통해 백악관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온 국민에게 보여주는 효과를 거뒀다. 하지만 김 사장의 사과에 대해 YTN 노조는 “낯 뜨거운 충성 맹세”라고 반발했다.

□김 사장의 본의를 알 길은 없으나, 사과가 이뤄진 과정을 보면 그런 의심을 받을 만하다. 사과 당사자여야 할 보도국과는 협의 없이 경영진들만 모여 진행했고, 편파 보도임을 검증하는 노력도 없었다. 게다가 지난해 11월 박민 KBS 사장이 취임 후 대국민 사과를 한 것과 흡사한 점에서도, 바뀐 정권에 대한 ‘항복 선언’이란 의심을 불러일으킬 만하다. 언론사 사장이 사과를 ‘패배자의 언어’로 전락시킨다는 것은 언론의 자유에 커다란 후퇴다.

정영오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