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바로크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1683~1764)부터 미국 현대음악을 대표하는 존 코릴리아노(1938~ )까지. 약 260년의 시간을 아우르는 방대한 레퍼토리를 실험하는 연주자의 연구실을 엿본 이틀이었다. 1, 2일 러시아 피아니스트 다닐 트리포노프(33)의 내한 리사이틀은 신동으로 불리던 젊은 연주자가 레퍼토리 확장으로 거장으로 성장해 가는 전형을 보여줬다. 트리포노프는 2010년 쇼팽 콩쿠르 입상, 이듬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및 전 부문 그랑프리 수상으로 세계 음악계에 이름을 각인시켰다. 그는 또래 음악가 중 단연 돋보이는 연주자로 성장했다. 콩쿠르 성과 못지않게 이후의 성장사가 중요함을 입증하려는 듯 그는 한국 팬들 앞에서 다양한 사조의 음악을 흡인력 있게 소화해 냈다.
트리포노프는 190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 작곡된 9곡을 연주한 1일 서울 롯데콘서트홀 공연에 수십 년이라는 의미의 '데케이즈(Decades)'라는 제목을 붙였다. 알반 베르크의 피아노 소나타로 시작해 코릴리아노의 '오스티나토에 의한 환상곡'까지 20세기에 급속도로 발전한 피아노 작품을 연대순으로 연주했다. 그는 서면 인터뷰에서 "나 자신에 대한 실험이자 20세기 가장 혁신적 작품들로 이뤄지는 시간 여행"이라고 설명했다. "20세기 음악을 연주한 적이 있지만 20세기 후반 음악을 포함해 이렇게나 많은 곡을 연주하진 않았다"는 그의 말처럼, 프로그램 구성은 도전적이었다. 이 곡들에 설득력을 부여한 것은 그의 연주력과 집중력이었다. 1부의 5곡과 2부의 4곡을 각각 쉼 없이 이어 연주하면서 익숙한 선율에서 벗어난 현대 피아노곡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음을 일깨웠다.
2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선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 '함머클라비어' 등 후기 바로크부터 초기 낭만주의 시기에 쓰인 전통적 명곡을 연주했다. 그가 사전 인터뷰에서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꼽은 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12번. 그는 "코로나19가 시작돼 수많은 공연 취소로 기다림의 연속이었을 때 이 곡을 비롯한 모차르트 소나타 작품을 깊게 파고들었다"고 했다.
트리포노프는 "한국에서 연주하는 것을 항상 즐긴다"고 했다. 그는 "한국 관객은 수용력이 뛰어나다"며 "관객과 연주자는 함께 나누는 음악을 통해 하나가 되기 때문에 음악가로서 관객과 감정적으로 연결된 느낌을 받는 것은 큰 선물과도 같다"고도 했다. 그런 한국 청중에게 그는 앙코르로 깜짝 선물을 선사했다. 첫날 현대곡 연주의 연장선상에서 미국 작곡가 존 케이지의 '4분 33초'를 앙코르곡으로 택한 게 화제가 됐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전위적인 곡이다. 트리포노프는 피아노 앞에 앉아 4분 33초의 시간을 재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그사이 객석에서 나온 휴대전화 소리와 기침 소리 등이 연주의 일부가 됐다. 한 관객은 "아이 러브 유"라고 외쳐 웃음을 자아냈다. 둘째 날엔 끝없는 박수와 환호로 앙코르곡을 3곡(존 월도 그린 '아이 커버 더 워터프론트', 스크리아빈 피아노 소나타 3번 3악장, 몸포우 쇼팽 주제에 의한 변주곡 중)이나 연주했다.
트리포노프는 2일 선보인 프로그램으로 5일 부천아트센터에서 한 차례 더 연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