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우파가 장악하고 공중분해” 대외비 문건 파장…누구의 '계획'이었나

입력
2024.04.01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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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장악' 계획한 내부 문건 논란 
박민 KBS 사장 취임 후 '할 일' 제시
노조 "①대국민 사과 ②우파 인사 
③단체협약 무시 등 문건대로 실행" 
KBS 측 "출처 몰라, 공유된 적 없어" 
전문가 "공영방송 파괴 시나리오 밝혀져"

공영방송 KBS의 간부를 ‘우파’ 중심으로 구성하고 노조와의 단체협약(단협)을 무시해 KBS 조직을 장악해야 한다는 내용의 KBS 내부 대외비 문건이 공개돼 파장이 일고 있다. 지난해 11월 박민 KBS 사장 취임을 앞두고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서엔 방송 공정성을 지키는 장치를 무력화하려는 내용이 다수 포함돼 있다. KBS 노조는 문건에 적시된 ‘계획’이 절반 정도는 실행됐다고 보지만, KBS 사측은 “공유된 적 없는 문서”라며 의혹을 부인했다. 전문가들은 문건 내용대로 실제 진행된 일이 적지 않은 만큼 문건 작성 주체 등 사실관계를 밝혀야 한다고 지적했다.

KBS 노조 "사실상 공식 문서"

전국언론노조 KBS본부는 1일 서울 여의도동 KBS본부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부 KBS 경영진들이 공유한 것으로 알려진 대외비 문건 일부를 공개했다. 노조는 ‘위기는 곧 기회다’라는 제목의 A4 용지 18장 분량의 이 문건이 박 사장 취임 직전인 지난해 10월쯤 작성된 것으로 추정했다. 이 문서는 KBS 직원의 제보를 받은 MBC 시사프로그램 ‘탐사기획 스트레이트’가 지난달 31일 보도하며 처음 알려졌다.

노조는 “문건은 국장급 직위자가 하급자에게 참고하라고 건네는 등 사측 간부들 사이에서 유통됐다”며 “단순한 개인의 아이디어가 아닌 회사 공식 문서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라고 주장했다. 반면 사측은 “출처를 알 수 없고 경영진이나 간부들에게 보고되거나 공유된 사실이 전혀 없는 문건”이라고 부인했다. 이에 대해 노조 관계자는 “사측이 모르는 문건이라면서 내부적으로는 제보자를 찾고 있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


"우파 중심으로"...박민 취임일에 간부 70명 교체

문건은 '사장 제청 즉시 챙겨야 할 긴급 현안' '사장 취임 즉시 추진해야 할 현안'으로 나뉘어있다. 세부적으로는 △인사로 조직 장악 △대국민 사과 △노조와의 단체협약 무시 △인력 감축 등을 ‘할 일’로 제시했다. 또 중기적으로는 ‘방송구조 개편(KBS 공중 분해)’을 예상하면서 "KBS 1TV는 교육방송, 아리랑방송 등과 결합"하고 "2TV는 민영화"할 것을 제안했다.



특히 인사에 대해 “우파 중심으로”, “임원이나 자회사 사장 및 감사, 국장급 직위에 대해서는 가능한 우파 등용”이라고 적혀있다. 노조는 “KBS를 정권의 입맛에 맞는 ‘관제방송’으로 만들기 위해 발버둥 친 사장은 여럿 있었지만 이번처럼 특정 정치세력이 장악해 좌지우지해야 한다는 시나리오를 세우고 실행에 옮긴 사례는 처음”이라고 비판했다. 또 특정 정치 성향을 우대해 간부에 임명하는 것은 국가인권위원회법, 근로기준법에서 적시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이자 방송법, KBS 인사규정 위반이라고 지적했다.

노조는 문건 내용 중 절반 정도는 실행됐다고 주장했다. 박 사장은 취임 당일 인사에서 부사장 등 간부 70여 명을 교체했다. 다음 날엔 ‘김만배 녹취록 보도’ 등 윤석열 정부에 불리한 것으로 여겨진 과거 KBS 보도에 대해 대국민 사과를 했다. 또 직원 과반의 동의를 거쳐 주요 간부를 임명하도록 한 단체협약을 어기고 보도국장 등 5명의 국장을 임명했다.

KBS는 박민 체제 들어 노골적으로 여권 편을 든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9시 뉴스’ 등 주요 프로그램 앵커가 돌연 교체되거나 ‘더 라이브’ 등 시사 프로그램이 폐지됐다. 또 윤석열 대통령 신년대담에서 진행자가 김건희 여사가 수수 의혹을 받는 명품백을 ‘조그만 파우치’라고 칭하고, 세월호 10주기 다큐멘터리 방송을 무산시켰다.


문건 작성 주체·회람 범위는 불분명

KBS 노조는 문서 양식 등을 볼 때 외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내부 조력자가 있었을 것으로 본다. 박상현 언론노조 KBS본부장은 “회사 내부 사람이 아니면 취득하기 힘든 데이터가 (문건에) 있다"며 "내부 조력자의 도움으로 내외부에서 같이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문건이 2017년 서울중앙지검의 수사로 존재가 드러난 이명박 정부 당시 국가정보원이 작성한 대외비 문건인 ‘MBC 정상화 전략 및 추진 방안’(2010년 작성)과 유사하다는 시각도 있다. 더불어민주당 언론자유대책특별위원회 위원장인 고민정 의원은 1일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명박 정부 국정원이 개입한 방송 장악 문건처럼 정권 핵심부가 개입해 작성된 것이라면 권력기관이 공영방송 사유화를 위법하게 노골적으로 추진한 셈”이라고 주장했다.

문서의 형식은 조악하지만 실제 발생한 일과 일치하는 내용이 적지 않은 만큼 작성 주체와 회람 범위 등을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야권 성향의 한 KBS 이사는 “문건은 윤석열 정부의 방송장악 내용을 충실히 담고 있으며 박 사장 취임 후 그대로 실행됐다는 점에서 문제가 크다”며 “작성 주체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창현 국민대 미디어전공 교수는 “윤석열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진행된 공영방송 파괴의 시나리오가 밝혀진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며 “문건의 사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국회 청문회와 국정조사 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KBS 노조는 문건의 방송법, 근로기준법 위반 소지에 대한 법적 대응을 검토하고 있다. 노조 측 자문변호사인 정민영 변호사는 "문건 내용이 박민 사장 취임 후 벌어진 일들의 직접적인 근거가 되었는지가 밝혀지면 법적인 책임을 묻는 절차도 진행할 수 있다"며 "4개월 동안 벌어진 일을 보면 문건 내용이 착착 실행됐다고 의심할 정황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남보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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