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밉상’은 환영받기 힘들다. 가난한 사람, 불우한 사람, 위기에 처한 사람은 하늘의 계명도 세상의 도덕도 다 같이 한목소리로 돕자 한다. 그런데 파렴치한 밉상은 어느 누구도 환영하지 않는다. 자기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남에게 해를 끼치고 주변 사람들에게 험한 상처를 준 이들. 매국노, 성폭행범, 강도, 금융사기꾼 등등. 목사인 나도 생각하면 용서보다는 분노가 앞선다.
탕자가 있었다. 아버지께 자기 유산을 미리 달라고 당돌하게 요구하더니 다 챙겨서 떠났다. 독립해서 사업이라도 하겠다면 박수 쳐 주겠건만, 이 녀석은 방탕하게 살면서 재산을 전부 탕진했다. 돼지 치는 일을 시작하며 돼지 먹는 것으로라도 배를 채우려 했다. 인생의 바닥을 쳤으니, 정신 차리고 인생 역전 휴먼 드라마를 연출하리라 기대했다면 실망이 클 것이다. 이 진상은 얼굴에 철판을 깐 채 늘 따습고 배불렀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고 누가복음은 전한다.
집에는 형이 있다. 늘 아버지를 섬기고 따르는 효자다. 그런데 눈이 뒤집혔다. 돌아온 탕자를 본 아버지의 반응 때문이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말하였다. 어서, 가장 좋은 옷을 꺼내서, 그에게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겨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가 잡아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누가복음 15:22-23). 화가 치민 형은 강력히 항의했다. 열심히 아버지를 도와 일했던 자기에게는 염소 새끼 하나 잡아준 적이 없는데, 집 나가 창기와 놀면서 재산을 탕진한 동생에게는 어떻게 이렇게….
누가복음이 전하는 아버지의 대답은 이렇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가진 모든 것은 다 네 것이다. 그런데 너의 이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되찾았으니, 즐기며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31-32). 형의 분노도 이해가 가지만, 아들을 둔 분들은 아버지의 심정도 잘 알 것이다.
‘돌아온 탕자’는, 예수가 사회의 밉상인 죄인들과 어울리자 이를 못마땅해하던 사회 지도자들에게 들려준 예수의 이야기다. 이런 밉상을 우리가 너그러이 받아들이고 환영하자는 것이, 예수의 가르침이 매우 각별해지는 지점이다. 제일 재수 없고 밥맛이고 역겹고 야비한 분노 유발자에게 하나님은 아버지처럼 제일 먼저 관심을 갖는다. 다음 말처럼. “건강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사람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복음 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