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에서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최악의 테러가 발생했다.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인 이슬람국가(IS)가 배후라는 관측에 무게가 실리고 있지만,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주장한다. "IS가 테러를 준비하고 있다"는 미국의 사전 경고를 무시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초대형 참사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러시아가 보복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 공세 고삐를 더 세게 쥘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등에 따르면 22일 저녁(현지시간) 모스크바 북서부 크라스노고르스크의 '크로커스 시티홀' 공연장에서 발생한 테러로 137명(24일 오후 기준)의 사망자를 포함, 2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영국 BBC 방송에 따르면 공연장엔 6,000명 넘는 인파로 가득했다.
현장 상황은 참혹했다. 테러범들은 연막탄을 던진 뒤 공연장으로 들어와 눈에 보이는 이들을 사살했다. 화장실, 비상계단 등을 구석구석 뒤지기도 했다. 생존자들은 "테러범들이 '산책하듯'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테러범이 던진 폭탄 등으로 건물 화재도 발생했다.
핵심 용의자 4명을 포함, 테러 관련자 11명은 즉각 검거됐다. 러시아 언론이 공개한 용의자 신문 영상에서 자신을 '1998년생 샴숫딘 파리둔'이라고 밝힌 한 남성은 "한 달 전쯤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는 신원 미상 인물이 범행을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범행 대가로 150만 루블(약 2,192만 원)을 받기로 했다"고도 전했다.
IS는 테러 배후를 자처했다. IS의 아프가니스탄 지부인 '이슬람국가 호라산'(ISIS-K)은 사건 직후 "우리 대원이 했다"고 공표했고, IS 자체 선전 매체 아마크통신은 용의자 4명의 사진도 공개했다. 아마크는 테러범 중 한 명이 한 남성의 목을 자르는 등의 장면이 담긴 영상까지 공개했다고 미국 CNN방송은 보도했다. 용의자 일부가 IS 활동 지역인 타지키스탄 출신이라는 점도 IS 배후설에 신빙성을 더한다.
러시아는 그러나 '우크라이나 배후설'을 밀고 있다. 근거는 핵심 용의자 4명이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불과 100㎞ 떨어진 곳에서 검거됐다는 것이다. 푸틴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에서 "그들은 우크라이나 방향으로 도주했는데, 우크라이나 쪽에 국경을 넘을 수 있는 창구가 마련돼 있었다고 한다"며 배후설을 강조했다.
우크라이나는 펄쩍 뛴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푸틴과 다른 인간쓰레기들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려 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에이드리언 왓슨 미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대변인도 "이번 공격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IS에 있다"며 "우크라이나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의심하는 건 이번 테러가 푸틴 정권을 크게 흔들 수 있어서다. 수도 한복판에서 발생한 초대형 테러는 '러시아 내부 안정'을 자신의 최대 강점으로 삼는 푸틴 대통령의 리더십을 훼손한다. 독일 싱크탱크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의 러시아 전문가인 알렉세이 유수포프는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의 테러를 포함해 러시아가 세계의 불안정 요인으로부터 안전하다는 믿음이 러시아 정권을 유지하는 핵심"이라고 독일 타게스슈피겔에 말했다.
무엇보다 미국이 수차례 IS의 테러 가능성을 경고했음에도 러시아가 이를 무시했다는 사실이 드러난 이상, 푸틴 대통령으로선 어떻게든 '제3의 배후'를 찾으려 들 수밖에 없다. 독일의 안보 전문가인 피터 노이만은 "'위협을 오판하고 미국의 조언을 공개 거부했다'는 사실은 푸틴을 부주의하고 어리석은 인물로 보이게 한다"고 말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배후설에 기반해 우크라이나에 대한 공격 수위를 높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푸틴 대통령 최측근인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키이우(우크라이나) 정권의 테러리스트로 확인된다면 (우크라이나를) 무자비하게 파괴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