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다를 수 없는 나라’는 프랑스 작가 크리스토프 바타유의 첫 작품이다.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아직 학부에 재학 중이던 습작생 시절이었다. 그즈음엔 하루하루가 너무 느리게 흘렀다. 무얼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채로 그저 읽으라는 책을 읽고 써 오라는 글을 썼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도 과제로 주어진 책 중 하나였다. 짧은 책이었고 다 읽고 책장을 덮었는데도 하루는 끝나지 않았다. 언제나처럼 여름은 길었고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았다.
최근 캄보디아로 여행을 다녀왔다. 떠날 때 한국은 겨울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었고, 6시간 만에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여름에 도착했다. 더위와 우거진 숲과 고대의 흔적이 기묘하게 느껴졌다. 햇빛을 피해 그늘을 골라 걸으면서 문득 소설에 대해, 넓게는 문학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다를 수 없는 나라’의 골자는 이렇다. 한 무리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18세기 베트남을 향해 배를 타고 떠난다. 그들은 1년이 넘게 걸려 사이공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한다. 그사이 프랑스에선 대혁명이 일어나지만, 선교사들은 알 리가 없다. 그들은 낯선 땅의 여름 속에서 그들의 모든 것이었던 하나님을 잊어간다.
이 책을 읽던 처음 읽던 여름, 나는 인간을 믿지 않았고 당연히 문학도 믿지 않았다. 따라서 이 소설의 결말은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신앙을 포함한 ‘모든 것’을 잊는다는 결말이 나이브하게 느껴졌다. 마땅히 소설이 가야 할 결말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전진하는 것으로 생각됐달까.
그러나 어떤 소설은 가야만 하는 곳이 있다. 신을 잊은 것은 모든 것을 잊은 것과는 달랐다. 그들은 신을 잊음으로써 인간을 발견했다. 고통과 고독과 사랑을 발견했다. 신의 빛이 걷힌 순간 바로 그러한 것들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한 것은 그런 결말 같은 것이 아니었다. 이미 오래전에 이런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음을 느꼈다. 캄보디아의 날씨와 풍경과 호수가 모두 선험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이 모든 것을 이미 경험했다는 느낌에 대해. 그리고 ‘다다를 수 없는 나라’를 떠올렸다. 바타유가 이 소설에서 그려냈던 베트남의 여름을 읽으면서 이미 오래전에 이러한 곳을 와본 것이다.
캄보디아의 여름 속에서 문학에 대해 아주 오래 생각하고 있었다. 이 풍경을 겪기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돼버렸다고 느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매 순간 달라지는 존재였다. 그 존재들이 쓰는 소설이란 늘 새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보여주는 세상을 나는 걷는다. 그 세상을 걸어보는 것이 결국 문학의 본질이라고, 이미 경험한 여름 안에서 다시금 골몰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