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 폭언 시달리다 숨진 수습직원... 법원 "업무상 재해"

입력
2024.03.19 15:44
일기·지인과의 카카오톡 근거로 '인정'

'이번주에 일도 잘 하려고 했는데, 욕 먹었던 대표님의 말이 자꾸 생각난다. 복기할수록 감정도 같이 올라온다.'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이렇게 일기를 쓰면서 괴로워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습직원에 대해, 법원이 업무상 재해를 인정했다. 업무상 스트레스를 인정하지 않았던 근로복지공단 결정을 뒤집은 판단이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행정 8부(부장 이정희)는 A씨의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 취소소송에서 지난해 11월 원고 승소 판결했다.

A씨는 2020년 7월 수습 기간 3개월을 거친 뒤 채용되는 조건으로 한 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그해 10월 그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조사 결과 A씨는 지인들에게 회사에서 대표로부터 많이 혼나 위축된다는 고민을 호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망 전날에도 회사 대표는 직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A씨에게 '정신질환이 있냐'거나 '처음 들어왔을 때와 달리 낯빛이 좋지 않다'는 등 폭언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유족은 A씨가 업무상 스트레스 때문에 숨졌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A씨의 우울증이 대표의 질책과 폭언으로 급격히 악화된 것이란 주장이었다. 하지만 공단은 "업무상 사유로 사망에 이르렀다고 보기 어렵다"면서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원 판단은 달랐다. 재판부는 업무와 재해발생 사이 인과관계는 규범적 관점에서 판단돼야 한다고 봤다. 의학적·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경위 △주위상황 △신체·심리적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병원 진료기록과 일기, 지인들과 나눈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토대로 A씨의 사망과 업무 스트레스 사이 상당한 인과관계가 인정된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회사에서 (수습기간이 지난) 3개월 후 해고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상당히 느끼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업무상 스트레스가 A씨의 우울증세를 크게 악화시켰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이어 "스트레스로 정신적 억제력이 저하돼 합리적 판단을 기대할 수 없어 자살에 이르게 된 것으로 추단(미루어 판단함) 되므로 이 사건 처분은 위법하다"고 덧붙였다.

이근아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