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받던 피의자가 외교사절로 출국해버린 이종섭 주호주대사 사건을 둘러싼 논란이 대통령실과 여당 지도부의 기싸움으로 번지는 등 좀처럼 잦아들지 않는 분위기다. 여권 일각에선 "이 대사가 즉각 귀국해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법조계에선 "지금 시점에서 이 대사를 불러봐야 할 수 있는 조사도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종섭 즉시 귀국' 카드가 실익 없는 정치적 퍼포먼스에 그친다는 지적이다.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이 대사가 즉시 귀국해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17일 기자들과 만나 "공수처는 즉각 소환하고, 이 대사는 즉각 귀국해야 한다"고 말했다. 수도권에 출마한 안철수·나경원 국민의힘 공동선대위원장도 이 대사 귀국에 무게를 실으며 한 위원장의 발언에 힘을 보탰다. 이 대사 본인 입장도 "언제든 갈 수 있다"는 쪽이다. 그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공수처가 요청하면 언제라도 귀국하겠다"는 뜻을 피력했다.
그러나 문제는 공수처 수사 진행 상황으로 볼 때 현실적으로 이 대사가 지금 와도 조사의 실효성이 거의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수사 외압 의혹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며, 국방부 내 의사 결정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자리에 있었다. 통상 이 대사와 같은 '윗선'에 대한 소환조사는 실무진과 중간 관리자 등의 진술을 다 받고 물증을 충분히 확보한 상태에서 가장 나중에 진행된다. 그런데 공수처는 아직 수사외압 의혹의 실행자에 해당하는 김계환 해병대사령관,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박진희 전 군사보좌관도 소환하지 않았다. 수사 초반인 지금 '윗선'을 곧바로 부르는 것은 수사기관이 가진 패만 보여주는 것과 다르지 않아, 득보다 실이 많은 것으로 간주된다.
핵심 피의자가 "나를 먼저 불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과거 검찰 조사에서도 그리 낯설지 않은 모습이다. 더불어민주당 전당대회 '돈 봉투 사건'에 연루된 송영길 전 대표도 비슷했다. 지난해 4월 24일 파리에서 귀국한 뒤 출국금지를 당한 송 전 대표는 5월 2일과 6월 7일 두 차례에 걸쳐 서울중앙지검에 스스로 출두했다. 6월 초 페이스북을 통해서는 "귀국한 지 한 달 반이 되어 가는데 검찰은 소환도 하지 않는다"며 여론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수사는 계획에 따라 진행될 것"이라며 "피의자의 일방적 출석에 따라 조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부했다. 당시 법무부 장관이던 한 위원장도 "마음이 급하시더라도 절차에 따라 수사에 잘 응하면 될 것 같다"고 거들었다. 결국 송 전 대표 소환은 윤관석 의원, 송 전 대표 전직 보좌관, 강래구 전 한국수자원공사 감사위원을 구속기소한 이후인 12월 8일에야 이뤄졌다. 귀국 후 8개월 만이다.
법조계에선 이런 수사 방식과 과거 전례를 잘 아는 한 위원장이 '이종섭 즉시 귀국·소환조사'를 언급한 것에 주목하고 있다. 진실 규명보다는 여론을 무마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는 해석이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누구보다 수사를 잘 아는 한 위원장이 의미 없는 귀국과 소환이라는 점을 모를 리 없다"며 "많이 절박한 모양"이라고 평가했다.
진실 규명은 뒷전이고 사건을 정쟁화하는 정치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공수처 수사가 정치공방의 대상이 되어버렸다"며 "여야가 모두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대로만 현안을 해석하며 독립기관을 흔들고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