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를 맛있게 해주는 책의 효능

입력
2024.03.09 04:30
19면
커피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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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려서부터 우유가 맞지 않았다. 마시기만 하면 배탈이 나는 통에 학교에서 나눠주는 우유도 못 먹었다. 그랬던 내가 카페라테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읽고 난 후부터였다. 노인 산티아고가 바다에 나가 큰 물고기와 전쟁을 치른 후 상처투성이로 돌아왔을 때, 소년 마놀린이 노인에게 가져다준 그 커피. 지쳐 쓰러진 노인의 피투성이 손을 잡고 울음을 터뜨리며 우유와 설탕 듬뿍 넣은 커피를 들고 달려가는 소년의 마음. 마지막 책장을 덮은 후에도, 그 부드러운 커피 맛이 내 입안에 진하게 감돌았다. 바다 위에서 홀로 사투를 벌이던 노인은 이미 나였으므로, 따끈한 그 커피도 내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카페라테를 마실 때마다 산티아고가 되었고, 유당불내증이 의심되던 체질 역시 어느샌가 바뀌었다.

'정보의 맛있음'이라는 말이 있다. 미각 수용기를 통해 전달되는 '관능적 맛'과 달리 음식과 관련된 지식이나 이야기가 우리 감각에 미치는 '사회적 맛'을 일컫는다. 똑같은 요리라도 그것에 깃들인 서사나 가치를 알고 먹을 때 훨씬 맛있게 느낀다는 사실은 여러 미각실험에서 이미 증명됐다. 사실 맛이라는 감각은 매우 주관적인 것이므로 개인의 추억이나 인식, 배경지식에 따라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 있다. 바꿔 말하자면, 한 잔의 커피일지언정 이 음료의 역사나 산지 사람들의 이야기를 알고 나서 마실 때, 그 맛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의미다.

남대서양 한가운데 떠 있는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는 나폴레옹의 최후 유배지로 유명하다. 여기서 생산되는 커피콩은 워낙 적은 데다 '영국 왕실 납품 커피'라는 이유로 극소량만, 매우 비싼 값에 유통된다. 나는 감사한 인연이 있어 2011년부터 매년 '세인트헬레나' 커피를 20㎏씩 예약 구매해왔다. 훌륭한 커피지만 관능적 맛으로만 따지자면 그 가격을 낼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단지 내가 이 커피를 사랑하는 것은, 모든 희망이 사라진 유배지에서 커피 한잔을 마시는 것만이 유일한 위로였다는 나폴레옹의 이야기를 '벳시와 황제'라는 책에서 읽고 깊이 공감한 까닭이다.

누구든, 지금 내 손에 들린 커피가 맛있기를 바란다. 좋은 원두로 만든 커피라는 전제가 붙지만, 커피를 맛있게 마시는 행복한 방법이 있다. 커피에 깃들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을 읽는 것이다. 운이 좋아서 양질의 커피 책 두세 권만이라도 읽고 나면, 평생을 두고 풍미 가득한 커피를 마시는 보증수표를 당신 손에 쥘 수도 있다.


윤선해 ㈜후지로얄코리아·와이로커피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