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성민원에 공무원 부서기피 만연... '삼진아웃제' 등 보호장치 마련해야

입력
2024.03.07 19:30
10명 중 7명 악성민원 경험
욕설과 폭언, 불합리한 민원도
전문가 '공무원 보호제도' 마련해야

#서울시 A과장은 5년 전 소상공인지원팀에 근무할 때 일을 떠올리면 지금도 식은땀이 흐른다. 한 민원인이 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사무실에 흉기를 들고 찾아와 할복하겠다고 행패를 부렸기 때문이다. 다행히 청원경찰이 제지해 다친 사람은 없었지만 그 이후 민원인 상대가 부담스러워졌다.

도로 긴급 보수공사 때문에 길이 막힌다는 이유로 온라인 카페에 실명, 소속부서가 공개된 뒤 민원에 시달리던 경기 김포시의 1년차 공무원이 지난 5일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악성 민원에 시달리는 공무원들의 실태가 재조명되고 있다. 권리의식이 높아지며 민원이 증가하고 '악성민원'도 폭증했으나 공무원 인권을 보호할 제도는 취약한 상황이라 제도적 보완이 없으면 이 같은 비극은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7일 대한민국공무원노동종합총연맹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공무원 악성민원 실태조사’를 실시한 결과 ‘최근 5년 사이 악성민원을 받아본 경험이 있느냐’는 물음에 응답자 7,061명 중 84%인 5,933명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들 중 70%가 월평균 1회 이상 이런 민원을 받았다. 응답자들은 욕설 및 언어폭력, 적절한 응대에도 지속적인 민원제기 등을 악성민원으로 꼽았다. 악성 민원이 주로 발생하는 부서는 △민원여권 △복지정책 △자원순환 △교통행정 △건축과 등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공무원 사회에 이들 부서 배치를 피하려는 현상이 만연해 있다. 서울 한 구청에서 교통행정과(주차단속)에 배치됐던 B씨(팀장)는 민원인들의 욕설에 시달려 인사이동 때까지만 참으려 했지만 기간이 길어지자 지난해 말 결국 육아휴직을 냈다. B씨는 "대놓고 '나 힘들어'라고 휴직을 하지는 못하지만 돌려서 육아휴직을 내는 경우가 많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안다"고 말했다. 경기도의 한 기초단체 관계자는 "다들 가기 싫어해서 초기 임용자나 전입자들, 승진한 사람들을 주로 배치하는 고육지책을 쓰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이처럼 기피 부서의 경우 자주 인사를 낼 수밖에 없고, 이는 업무 효율성이 떨어지는 악순환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선거를 의식한 기관장들이 표를 의식해 민원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악성민원에도 공무원들을 보호하지 않으면서 상황이 악화됐다고 지적한다. 허창덕 영남대 사회학과 교수는 "단체장들이 민원을 해결하면 '공무원들이 일을 잘한다'고 하고, 민원이 계속되면 '일을 못한다고' 하는 한 민원부서 공무원들은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다"며 "기관장들은 적법하지 않은 민원을 제기하면 공무원들을 질책할 것이 아니라 대범하게 이를 막아 지역사회의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시 한 관계자는 "악성민원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하는 '민원대응평가'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전화 친절도 조사, 방문 민원 친절도 조사 등을 통해 친절도를 개인별, 부서별 등수로 매기고 고과에 반영하는 제도다. 불친절한 부서는 관리자에게 친절 교육을 강제한다.

공무원 인권조례 제정, 악성민원 삼진아웃제 등 공무원들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 마련과 보완도 시급하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장은 “폭언·폭행 등을 할 경우 고지 후 일정 기간 응대하지 않아도 되는 ‘민원응대처리법’이 있지만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며 “공무원들에게는 ‘피할 권리’, ‘벗어날 권리’를, 민원인에게는 ‘블랙리스트로 지정될 수 있다’ 등을 인식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임명수 기자
권정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