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는 원하시는 곳부터 보시면 됩니다."
알제리 태생의 '설치미술 거장' 필립 파레노(60)의 한국 첫 개인전 '보이스(VOICES)'가 열리는 서울 용산구 리움미술관. 리움은 2004년 개관 이래 처음으로 전시 1개에 전관을 할애했다. 파레노의 작품 40여 점이 야외, 로비, 전시실 곳곳에 분포돼 있는데, 관람 순서를 알려주는 '화살표'를 찾을 수 없다. 입장권을 들고 "어디가 처음이냐"라 묻자 직원으로부터 "아무 데서나 시작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이는 철저히 작가가 의도한 바다. 스스로를 '드리프터(drifter·부유하는 사람)'라 칭하는 파레노에게 '부유'는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삶의 태도이자, 지금 이 순간에 머무는 감상 방식이다. "시작도 끝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부유하는 순간은 온전히 나와 함께 있는 순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도 전시실에서 '나의 타이밍'에 따라 '나의 순간'을 느끼시기를 바랍니다."(지난달 28일 파레노의 아티스트 토크(관객과의 대화)에서)
편의상 야외 덱의 대형 설치작 '막(膜)'에서 시작해보자. 13.6m 높이의 거대한 금속 설치물에 42개의 센서가 탑재돼 있다. 기온, 습도, 풍량, 소음, 진동 등 외부의 자극을 데이터로 바꾼 뒤 소리로 전환한다. 리움은 '막'을 설치하려 11년 동안 야외 덱을 지킨 애니시 커푸어의 '큰 나무와 눈'을 철거했다. 2022년 봄부터 리움과 전시를 논의해온 파레노는 미술관 입구를 보자마자 이 구조물이 놓여야 할 자리로 낙점했다는 후문이다.
야외의 '막'이 자극을 수집하는 감각기관이라면, 미술관 전체는 이 데이터를 받아들여 사고하는 '두뇌'처럼 보인다. 자연환경으로부터 수집한 '막'의 데이터에서 도출한 결괏값은 변화무쌍하다. 김성원 리움미술관 부관장은 "전시 전체가 하나의 자동 기계처럼 움직이고 반응하며 변화한다"면서 "변화하는 주체들의 모습과 시간의 경험을 선사하는 전시"라고 설명했다.
지하의 '그라운드갤러리' 공간의 설치 작품은 할로겐 전구, 움직이는 벽 등으로 구성돼 있는데 계속해서 이동하고, 번쩍이고, 소리를 낸다. 이 역시 바깥 세계의 '막'에 의한 것이다. 이 같은 장치로 파레노가 시도하는 것은 '균열 내기'다. "미술관은 항상 닫혀 있고 외부를 향해 등을 돌리고 있는 듯해요. 비싼 제품들이 진열돼 있고 온도와 습도까지 조절되는 공간이죠. 거기에 틈을 내고 싶어요."
"나는 가상의 캐릭터야. 하나의 기억, 유령이 아닌···."
익숙한 목소리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니 파란 빛의 공간이 펼쳐진다. 배우 배두나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화면에서 일본 만화 캐릭터 '안리'가 말하고 있다. 목소리의 주인은 배두나이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이 대사를 읽은 적이 없다. 그의 음성 역시 '막'이 제어하는 신호를 통해 새로운 언어 '델타 에이'를 학습한 인공지능(AI)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배두나는 이 작품을 보고 "내가 언제 저런 말을 했지?"라며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의 목소리는 전시장 곳곳에서 울려 퍼지며 미술관 안팎의 온도, 습도, 진동, 관객들의 반응 등과 함께 뒤섞여 매 순간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낸다.
왜 배두나일까. 전시 제목대로 '보이스(목소리)'가 전시를 관통하는 핵심 요소인 만큼, 파레노는 지난 4월 적합한 목소리를 찾으려 캐스팅에 나섰다. 배두나의 감성적인 목소리에 매료된 파레노는 직접 전시 취지를 설명했고 배우는 재능기부로 전시에 참여했다. "목소리를 만들 수는 있어도 감성은 AI가 생성할 수 없죠. (파레노)"
이번 전시는 올해 11월 독일 뮌헨의 미술관 '하우스 데어 쿤스트'와 협업해 이란성 쌍둥이 전시로 개최된다. 공통 주제와 핵심 작품을 공유하지만, '이란성'인 까닭은 파레노의 전시가 미술관 안팎의 환경과 관객들에 따라 변하기에 완전히 똑같은 전시를 구현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 전시에선 여성 앵커의 이성적인 목소리가 울려 퍼질 예정이다. 리움 전시는 올해 7월 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