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오업계 회사원 임지선(가명· 33)씨는 '가짜노동'이 우리 삶을 좀먹고 있다는 결론에 격한 공감을 표시했다. 그의 일은 제품을 개발하고 품질을 관리하는 업무다. 사명감을 가지고 이 일에 뛰어든지 5년이지만, 지선씨는 이 업계 특유의 가짜노동에 허덕이고 있었다.
대표적인게 바로 무분별한 '복사' 관행. 지선씨가 말했다. "옆 회사가 내놓은 건강기능식품이나 의약품이 잘팔리잖아요? 그러면 성분이 똑같은 제품을 다른 회사들도 복사해서 내놓아요. 저희 회사라고 다를 게 없죠."
특정 회사의 독점구조를 깬다는 점에서 복사하기 관행이 의미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는 △한때 잠시 유행하는 건강기능식품 △과포화 상태인 제네릭의약품(특허가 끝난 오리지널 의약품을 복제해서 만는 약품)에 대한 개발·실험이 이뤄질 때가 답답하다고 했다. 이런 제품들은 복사생산해도 사업성이 크게 떨어지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시간을 개발에 쏟아도 실제 판매까지 이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한다.
"사전에 상황을 보고해도 달라지지 않아요. 위에선 그냥 개발하라 하죠. 다 만들어놓으면 결국 안 팔거나 못팔아요. 그냥 비는 시간이 있으면 안되니까, 일종의 시간 때우기 용으로 시키는 거예요." 지선씨가 계산해 보니 쓸데없는 실험에 쓰이는 시간이 전체 업무의 20%이상이란다.
지선씨 삶을 갉아먹는 가짜노동은 또 있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각종 술자리, 회의가 누적되며 퇴근 시간은 점점 늦어졌다.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시계가 가리키는 시각은 항상 밤 10시. 지난해 말 결혼해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길 법도 하지만 집에 가면 잠을 청하는 데 급급하다고 한다. "쓸데없는 업무만 줄면 일찍 퇴근할 수 있겠죠. 남편이랑 마음 편하게 맛집 데이트를 가거나 테니스 배우는 게 소원이에요. 출산이요? 저희 삶도 팍팍한데 아이를 갖고 싶겠어요?"
지선씨 부부에게만 일어나는 일일까? 가짜노동은 꽤나 많은 젊은이들의 결혼·출산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 한국일보와 일하는시민연구소가 지난달 14~16일 직장인 3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표본오차 95% 신뢰수준 ±5.66%포인트) 결과, 응답자 20.6%는 "과도한 노동시간과 업무량으로 결혼 혹은 연애를 주저한 적 있다"고 답했다. '출산 계획을 미루거나 포기한 적이 있는지'를 묻는 질문에도 결혼한 직장인들의 21%가 "그렇다"는 답을 내놨다. 임명호 단국대 심리학과 교수는 "자신의 삶이 보장되지 않고, 나부터 힘든데 결혼과 출산을 고민하라고 하는 것 자체가 폭력적이다"이라고 해석했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공무원 이주호(가명· 36)씨도 이 문제에 공감했다. "하루에 저한테 오는 업무쪽지가 수십 개예요. 대부분 자료 요청 쪽지죠." 문제는 불필요한 자료 요청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같은 내용을 요구해요. 세부적으로만 다르죠. 이를테면 한 부서는 2023년도 자료까지 달라, 다른 부서는 2022년도 자료까지 달라 해요. " 주호씨는 이러한 허식노동을 두고 '혼자서 10명이랑 탁구를 치는 기분'이라고 말했다. 허식노동 때문에 오후 9시에 퇴근하는 날도 적지 않다고 한다.
늘어난 근무시간의 여파는 가정으로 이어진다. "아이들이 8시에 자거든요. 쪽지업무로 야근이라도 하면 아이들을 아예 못 보는 거죠." 아이들에게 미안함을 느꼈던 날도 기억하고 있었다. "어린이집 방학기간에 저희만 애들을 보내요. 저희 부부 둘 다 퇴근이 늦어져 아이들이 홀로 어린이집에 남아있는 거죠." 그는 자신의 경험을 미루어 봤을 때 결혼 하지 않은 청년들의 마음이 이해가 간다고 했다.
가짜노동 탓에 정작 해야할 '본업'을 못하는 사례도 발견된다. 15년 차 초등교원 조모(41) 교사가 그렇다. 조 교사는 자기 학교 교사들 사이에서 '친목 선생님'으로 통한다. 근처 학교와의 교직원 축구대회를 열기 위해 공문을 작성하고, 각종 경조사를 안내하며, 회식·환영회와 같은 각종 행사를 준비하는 게 그의 일이다. '교사 간 친목' '학교 간의 체육대회'를 챙기느라 정작 아이들 지도와 교과 연구에 소홀히 할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럴 때마다 조 교사는 자괴감을 금치 못한다.
아예 가짜노동이 주업으로 둔갑한 경우도 있다. 지난해 8월 정년이 보장되는 공공기관을 떠나 다시 구직 경쟁에 뛰어든 A씨는 가짜노동 때문에 퇴사를 결심한 인물 중 한 명이다. 공공기관에서 그는 수시로 이뤄지는 불시 감사에 트집 잡히지 않기 위해 매일 작업계획서를 작성해 쉬지 않고 근무 중임을 보여줘야만 했다. 30분도 채 걸리지 않은 분리수거를 3시간 동안 진행된 '사무실 환경정리' 업무로 둔갑시켰고, 업무가 취소된 날에는 '사무실 비상 대기'라는 그럴듯한 핑계를 대고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기도 했단다.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곳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A씨가 남긴 퇴사의 변이다.
가짜노동은 업무 자체의 효율성을 떨어뜨릴 뿐 아니라, 노동자의 여가를 사라지게 해 근로의욕을 낮추기도 한다. 실제로 한국 직장인들은 가짜노동으로 늘어난 근무시간으로 인해 가족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취미생활을 접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직장인 중 45.6%는 "과한 근로시간과 업무량으로 포기한 취미생활이 있다"고 답했다. "건강이 나빠졌다"고 답한 이들도 47.3%에 육박했다. 폐해는 육체적 건강에만 국한되지 않아 "가짜노동이 유발한 스트레스에 주변인과 갈등을 빚은 적 있다"고 답한 비율도 45.3%에 달했다.
금융업 종사자 양준호(가명· 27)씨는 눈치노동으로 일상이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급한 일도 아닌데 상사가 퇴근을 안 해요. 왜냐구요? 그 윗사람이 퇴근을 안 하니까요." 준호씨가 오후 6시 퇴근할 수 있었던 날은 5일 중 단 하루. 친구들과 잡은 약속 1시간 전에 불참을 알리는 일이 다반사고, 퇴근 후에 가려던 피트니스센터도 포기했다. 준호씨는 "축구동호회도 탈퇴를 고민하고 있다"며 "운동 못하고 술 마시고 늦게 퇴근하니 피로는 일상"이라고 씁쓸해했다. 준호씨는 회사에 파다한 가짜노동만 사라져도 삶이 두 배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단언했다.
가짜노동이 인생을 잠식하는 이 엄연한 현실에 대해, 서이종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스스로 의미있다고 생각하는 일에 시간을 쏟는 것에 회의를 느끼는 직장인은 없다"며 "그러나 불필요한 노동으로 인해 야근을 하고 이 때문에 자신의 삶과 가족의 행복이 무너지면 직장인들은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