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반년 김진주(가명·28)씨는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이렇게 소개했다. 직업도 이름도 아닌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로 자신을 소개할 때, 사람들은 놀랐지만 진주씨는 오히려 담담했다. 참담했던 그 사건을 겪은 뒤, 진주씨는 '범죄 경험자'를 자처하면서 다른 피해자를 위해 인생 2막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지난달 10일 부산에서 한국일보와 만난 진주씨는 "피해자 지원 제도에 대해서라면 며칠도 모자라다"며 이야기를 쏟아냈다.
2022년 5월 22일까지, 진주씨는 "누구나 범죄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의 그 '누구'가 자신이 될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새벽 귀갓길 일면식도 없는 전과 18범 이현우(32)의 돌려차기에 정신을 잃기 전까진 말이다. 이현우는 뒷통수를 정확히 가격한 뒤 머리와 얼굴 부위만 노려 사정없이 걷어찼다. 이후 진주씨를 둘러메곤 폐쇄회로(CC)TV가 없는 사각지대로 끌고 가 성폭행하려 했다. 지난해 9월 이현우는 강간살인미수 혐의로 징역 20년형이 확정됐다.
진주씨는 2022년 10월 이현우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건 뒤에야 범행 장면이 담긴 CCTV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언론 제보로 충격적인 범행 모습이 세상에 알려지자, 연락을 해온 건 기자들만이 아니었다. 비슷한 아픔을 겪은 피해자들도 여럿 있었다.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건 인천에서 보복살인으로 사촌동생을 잃은 A(46)씨였다고 한다. A씨와 진주씨는 또 다른 강력범죄 피해자 세 명과 함께 '범죄피해자연대'(가칭)라는 자조 모임을 꾸렸다.
그 무렵 진주씨에겐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메시지가 빗발쳤다. "도와달라"는 요청부터, "용기내줘서 고맙다"는 응원까지. 온라인 소통을 넘어 피해자들과 직접 얼굴을 맞대기도 했다. 반년간 거주지인 부산에서 서울 등지를 오가며 만난 피해 당사자와 그 가족들만 족히 50명이 넘는다. 깊은 얘기를 하는 건 아니다. "서로의 민낯(상황)을 너무 잘 아니까 부담감이 안 생긴달까요. 피해자분들은 '피해를 겪은 존재'라는 것만으로 그냥 (저를) 좋아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도 김씨는 "범죄피해자센터에서 지원을 받는 피해자들도 도움을 청하는 연락이 종종 오는 걸 보면, 지원이 그만큼 허술한 것 아니겠냐"고 씁쓸해 했다.
피해자들을 마주해보니, 진주씨는 그간 되뇌었던 질문들이 결코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성폭력'이나 '무차별' '강간' 키워드로 검색을 했을 때 '몇년 형을 받았다'거나 '집행유예를 받았다'는 얘길 주고받는 가해자들의 커뮤니티가 상위에 떠요. 이상하지 않아요? 가해자를 돕는 변호사 홍보 글도 수두룩한 것에 무력감이 들었어요." 그는 곧바로 피해자들만을 위한 커뮤니티를 만들었다. 그렇게 지난해 7월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대한민국 범죄피해자 커뮤니티(KCC·Korea Crime Victim Community)라는 온라인 카페가 문을 열었다. 현재 범죄피해자와 일반 시민 260여 명이 가입해 활동 중인 이 카페에는, 낯선 재판 용어 풀이부터 법원에서 서류 떼는 법까지 피해자를 위한 게시물들이 올라와 있다. 피해자들이 경험을 공유한 것들이다.
진주씨 역시 자신의 SNS를 피해자 상담 창구로 열어뒀다. 그들에게 실질적 조언을 해주거나, 공론화를 위한 언론 제보를 돕기도 한다. 더욱 직관적 설명을 위해 유튜브 채널까지 팠다. 채널명은 '피해자를 구하자'이다. 범죄피해자가 되면 해야할 일, 변호사 고르는 법 등 자신의 경험담과 전문가의 조언을 담은 동영상을 찍고 직접 편집도 한다. "요새는 몸이 두 개만 더 있었으면 좋겠어요." 최근 김씨는 본업인 프리랜서 디자이너 일도 1년여 만에 다시 시작했다.
그래도 피해자를 돕는 일엔 만사 제쳐두고 나선다. 특히 최근 2심 선고가 난 '부산 보복살인 미수' 사건은 진주씨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다. 사경을 헤매던 피해자가 겨우 회복해 가해자와 함께 근무하던 직장에 복귀했는데, 2차 가해 탓에 사표를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피해자분에게 검찰청 담당자가 "가해자 공탁 걸려있는데 공탁이 더 많은데 받으시지"라고 했대요. 피해자가 가해자의 돈을 받고 싶겠어요?"
그렇게 열심히 뛰다보니 진주씨는 어느새 피해자들을 대표해 정부에 목소리를 내는 아이콘이 됐다. 지난해 10월 국정감사가 시발점이 됐다. 피해자는 재판 기록 열람·등사 조차 못해 '제3자'가 된다거나, 민사소송 중 주소가 노출돼 보복협박을 당한 점들이 지적을 받았다. 진주씨는 그뒤로도 주무부처인 법무부에 피해자 지원 제도에 전면 재건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공적 지원으론 채워지지 않는 부분도 느꼈다. 이를 위해 민간 공익 플랫폼을 계획했다.
그가 구상한 플랫폼은 두 축으로 이뤄진다. ①먼저 매너스(Manners)라는 범죄 피해자 온라인 교육 플랫폼이다. 피해자들에게 유용한 법률 상식이나 2차 가해가 일어났을 때 대처법, 범죄피해자 지원센터 활용방법, 피해자 지원제도와 관련 단체 등을 한데 묶어 놓은 가이드북을 만들 생각이다. 특히 현재 오프라인으로 여러 서류를 내야만 하는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해, 온라인 기반 안내 시스템을 꾸리는 게 목표다. ②돈애스크(Don't Ask)라는 범죄 피해자 인식 제고 브랜드도 준비 중이다. 각 브랜드의 상표 출원까지 마친 진주씨는 웹사이트를 구성하는 작업 중이다. 그는 돈애스크를 상징하는 '묻지마 범죄를' 배지를 들어보이며 "범죄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지 말고, 강력 범죄들을 그냥 묻고 넘어가지 말자는 중의적 의미"라고 설명했다.
진주씨는 '필명 김진주'로 그간의 여정과 소회를 엮은 책도 펴내기로 했다. 이달 하순이면 저서 '싸울게요, 안 죽었으니까'가 발간될 예정이다. 돌려차기 사건 이야기와 그후 겪은 피해자 지원 제도에 대한 아쉬움, 다른 피해자들과 연대한 이야기, 한동훈 전 법무부 장관과의 일화 등이 담겼다. 책의 말미엔 가해자 이현우에게 쓴 편지도 담았다. "(네가) 보복협박 편지를 보낼 테니깐, 나는 회복 편지를 보낸다고 썼어요. 가해자에게 이 책을 맨 먼저 보낼 겁니다."
다음은 해당 진주씨 책의 원고(교열 전) 발췌.
앞으로의 가장 큰 목표를 묻는 질문에, 진주씨는 고민없이 "범죄 피해자가 숨지 않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또다른 범죄피해자들에게 남긴 메시지는 간결했다. "살아줘서 고맙습니다."
※부산 돌려차기 사건 피해자 김진주(가명)씨와의 인터뷰를 담은 두 번째 기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