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코로나 끝나자 '팬데믹 협정' 외면하는 선진국

입력
2024.01.24 04:30
14면
2년 전 '팬데믹 협정 만들자' 합의
코로나 잦아들자 '미지근해진' 선진국
WHO "미래세대가 우리 용서 안 해"

코로나19 '팬데믹(감염병 세계적 대유행)'을 계기로 세계보건기구(WHO)가 추진해 온 '팬데믹 협약'이 좌초 위기에 처했다. 2년 전 회원국 합의로 협상 절차에 돌입했지만 그새 코로나19가 잠잠해져 위기감이 줄었고, 선진국들이 '이익 공유'에 부정적이어서다. 부유한 국가에선 우파를 중심으로 "국가주권을 WHO에 넘기는 협약"이란 주장마저 나오고 있다.

테워드로스 아드하놈 거브러여수스 WHO 사무총장이 22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WHO 집행이사회에서 팬데믹 협정에 대해 "합의를 이루지 못하면 미래세대가 우리를 용서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호소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전했다.

한때는 뜨거웠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1년 12월 유럽연합(EU)을 필두로 한 회원국들은 WHO 헌장 제19조에 따라 팬데믹 예방·대응을 위한 '팬데믹 협약'을 만들기로 합했다. 이 조항은 보건총회에 국제 협약·협정을 채택할 권한을 부여하는데, 이런 식으로 총회를 통과한 국제협약은 2003년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이 유일할 만큼 드문 결정이었다. WHO는 이 합의에 "모든 사람의 복지를 보호하고 증진하기 위해 세계 보건 구조를 강화할 수 있는,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기회"라며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듬해 7월엔 협약에 법적 구속력을 부여하자는 합의도 이뤄졌다.

협약의 핵심은 '의료 접근 형평성'이다. 코로나19 유행에서 불평등한 백신 수급, 정보 소외 등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 '빈부격차'가 낱낱이 드러났던 만큼 이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였다.

그러나 2년여가 흐른 지금 국제사회는 미적지근하다. 미국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는 지난 3일 "코로나19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며 팬데믹에 대한 규칙을 마련하기 위한 전 세계의 거대한 노력이 흔들리고 있다"며 "정치적 관심이 다른 이슈로 옮겨 갔다"고 꼬집었다.

무엇보다도 선진국이 개발도상국과 파이를 나누길 꺼리는 게 문제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협정에서 '이익 공유'에 관한 내용이 특히 논쟁 대상이다. WHO는 팬데믹 상황에서 국가들이 바이러스 샘플을 공유해 백신 생산을 돕고, 제약업계는 현금을 기부해 각국의 질병 대비에 도움을 주는 구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제약 업계와 미국·EU·영국·캐나다·스위스·아랍에미리트연합 등 부유한 국가들은 여기에 반대했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도 "유럽 국가들은 팬데믹 예방에 더 많이 투자하기를 바랐고 아프리카는 지식, 자금, 백신 등 '대응책'에 대한 적절한 접근을 원했다"며 이해관계가 엇갈렸음을 인정했다.

선진국 우파를 중심으로 'WHO에 주권을 넘기는 협정'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도 협상 걸림돌이다. 지난해 3월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가 팬데믹 협정을 겨냥해 "국가가 WHO에 권한을 양도해서는 안 된다"는 트윗을 올렸다. 여기에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답글로 "국가들은 주권을 WHO에 양도하지 않고, 팬데믹 협정은 이걸 바꾸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WHO는 협약 체결에 강한 의지를 보이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거브러여수스 사무총장은 22일 "우리는 이 역사적인 합의, 세계 보건의 이정표가 방해받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WHO는 5월 27일 세계보건총회에서 팬데믹 협약을 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WHO 회원국 3분의 2 이상 출석, 투표 회원국 중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야 협약이 체결되는데 이 숫자를 모으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김나연 기자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