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내 표현의 자유 패배”…유대계에 밀려난 하버드대 흑인 여성 총장

입력
2024.01.04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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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개교 이래 첫 흑인 여성 총장
반유대주의 논란 후 사퇴 압박 직면 
“유대 자본 압력에 굴복” 논쟁 불붙어

미국 대학가를 뒤흔들었던 ‘반(反)유대주의 논란’ 속 거센 사퇴 압박에 시달리던 클로딘 게이 하버드대 총장이 끝내 자리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인 이유는 논문 표절 의혹 때문이었지만, 재정의 상당 부분을 기부금에 의존하는 대학이 유대계 자본의 압력을 끝내 이기지 못한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펜실베이니아대에 이어 하버드대 총장마저 씁쓸하게 물러나면서 대학 내 표현의 자유가 코너에 몰렸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인종적 적대감 위협” 게이 총장 하소연

미국 뉴욕타임스(NYT)에 따르면 게이 총장은 2일(현지시간) 학교에 보낸 서한에서 ”구성원들과 상의한 결과, 제가 사임하는 것이 하버드에 가장 이익이라는 게 분명해졌다”며 스스로 물러나겠다고 발표했다. 뉴욕의 아이티 이민자 가정 출신인 게이 총장은 지난해 7월 총장에 취임했다. 하버드대 역사상 첫 번째 흑인 총장이자, 두 번째 여성 총장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만에 사퇴하면서 1636년 하버드대 창립 이래 최단기간 재임 총장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게 됐다.

그는 ”증오에 맞서며 학문적 엄격함을 지키겠다는 나의 기본 원칙이 의심받는 것은 괴로운 일이었고, 인종적 적대감으로 인신공격과 위협을 당하는 것은 두려운 일이었다”고 밝혔다.

논란 속에서도 직을 유지하던 게이 총장 낙마의 결정타는 논문 표절 의혹이었다. 월가 유대계 거물 빌 애크먼 퍼싱스퀘어캐피털 최고경영자 등 보수 인사들과 언론이 연달아 공론화했다. 하버드대는 "게이 총장의 1997년 박사 논문 등에서 몇 가지 부적절한 인용 사례를 발견했지만 문제가 된 부분만 수정하면 된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최근까지도 추가 표절 의혹이 불거졌고, 부담이 커진 게이 총장은 끝내 사의를 표명했다.

앞서 게이 총장이 본격적인 거취 압박을 받게 된 계기는 지난달 5일 미 하원 교육·노동위원회 청문회였다. 지난해 10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 하마스 간 전쟁 발발 이후 학내 시위에서 등장한 반유대주의 구호가 교칙 위반 아니냐는 공화당 의원 질문에 게이 총장이 명확한 답을 내놓지 않으면서다.

보수 진영에선 그가 유대인 혐오를 옹호했다며 연일 공세를 펼쳤다. 이른바 유대계 ‘큰손’들은 하버드대 기부를 철회하겠다고 나섰다. 2억7,000만 달러(약 3,500억 원) 넘게 기부했던 유대계 렌 블라바트니크 가족재단도 기부 중단을 선언했다. 유사한 압박을 받았던 리즈 매길 전 펜실베이니아대 총장은 일찌감치 사임했다.


”위대한 대학 거짓 협박에 무너져” 개탄

게이 총장 낙마로 대학 내 표현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은 불에 기름을 끼얹은 모습이다. 하버드 학내에선 표현의 자유를 수호해야 할 대학이 자본의 압력에 굴복했다는 비판까지 제기되고 있다. 하버드대 지난해 수입(58억 달러) 중 45%가 기부금이었다. 흑인 법학자 랜달 케네디 하버드대 교수는 ”거짓과 협박의 선전운동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지 못한 위대한 대학의 무능이 슬프다”고 밝혔다.

흑인 여성 게이에 이어 하버드대 임시 총장에는 백인 남성인 앨런 가버 교무처장이 임명됐다. 경제학자이자 의사 출신인 가버 처장은 그간 하마스 테러에 강경한 입장을 취해온 인물이다. 특히 교내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이 몸담은 학교가 하마스를 충분히 강하게 비판하지 못했다고 비난하기도 했다.

위용성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