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낙서 모은 '수치의 담'… 작은 낙서도 '경복궁 담장 낙서'와 같은 범죄

입력
2023.12.30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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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구, 차지현, 김근식, 숙화… 애인을 구하는 키가 약 164cm인 익명인과 얼굴을 알 방도가 없는 꽃미남 3명… 가치를 산출하기 어려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스스로 남긴 낙서로 ‘박제’된 이들이다. ‘019’로 시작하는 휴대폰 번호와 ‘1993’이라 적힌 방문 연도에서 이미 십수 년은 거뜬히 넘긴 낙서도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연말 온 국민의 분노를 산 ‘경복궁 담장 낙서’처럼 세간의 이목을 끌지는 못했지만, 수일 만에 사라진 범행의 결과보다 긴 세월을 버티며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수치의 담장’이다. 경복궁, 수원화성 등 시민 접근이 용이한 수도권의 사적(지정문화재) 10여 곳을 사흘 동안 살펴보니 낙서·판박이 등 명백한 훼손 사례만 100여 건을 발견할 수 있었다. 주로 자유 관람이 허용된 공원형 사적 내 석재에 비해 훼손이 쉬운 벽돌과 목재 시설에 사례가 집중돼 있었다.

이런 낙서는 금전적 이득, 대중의 관심 등을 동기로 행해지는 파괴행위(반달리즘)와는 달리 ‘가벼운’ 것으로 취급된다. 현금과 취업을 위해 범행을 저지른 10대 임모씨나 치기 어린 관심을 끌기 위해 범행을 저지른 20대 설모씨와 달리, 수많은 익명의 낙서범들은 현재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게시할 기념사진을 촬영하는 것과 같은 무게의 마음가짐으로 위법이라는 것도 인지하지 못한 채 만행을 저질렀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사건을 통해 잘 알려졌듯이 문화재상의 낙서는 반영구적 파괴행위로 수많은 인력과 비용이 투입돼 국가에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다.




문화재 훼손 방지 대책으로 경찰과 문화재 관리 기관의 협력하 순찰이 강화되고 폐쇄회로(CC)TV 증설이 계획돼 있다. 당장 이번 범행 표적이 된 경복궁은 물론 시내 5대 궁 경내에는 최근 며칠간 순찰을 도는 관계자들의 모습이 눈에 띄게 늘었다. ‘보는 눈’이 많을수록 범죄를 저지를 확률이 줄 수는 있으나 ‘감시와 통제’ 방식의 예방책은 한계가 있다.

왕조시대 금군 수준으로 경비 인력을 늘리지 않는 이상 넓고 복잡한 궁 내외부를 사각지대 없이, 하루 24시간 감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수원화성, 남한산성, 한양도성처럼 더 넓은 사적은 가당치도 않다. CCTV 역시 범행 후 사후 대처에 도움이 될지언정 실시간 범행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당장 이번 경복궁 담장 낙서범 역시 범행 장면이 고스란히 CCTV에 촬영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범행을 저질렀다. 낙서는 특별한 준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짧은 시간 안에 끝낼 수 있는 탓이다.



가장 확실하고 쉬운 예방책은 접근을 제한하는 물리적 단절이지만 이는 최악의 해법이다. 문화재를 일반이 체험할 수 있도록 공개하는 추세에 역행함은 물론 보호 시설 자체가 문화재의 온전성을 해치는 경우도 많다. 사적과 같은 공간형 문화유산은 멀찌감치 걸린 그림 마냥 그저 볼 때가 아닌, 당대의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직접 걷고 정취를 느낄 때 빛이 발하는 법이다.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식상하지만 '검증된 방법'인 시민의식 함양뿐이다. 문화재를 훼손하는 것이 규모를 떠나 수치스러운 일이라는 것을 사회가 끊임없이 상기시켜야 한다. 낙서는 추억도 예술도 아닌 범죄다. 근래 철없는 10·20대 범죄자를 비판했던 이들 중 과거에 ‘수치의 담’을 쌓는 데 일조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작은 낙서를 끄적인 이들의 죄는 작지 않다.



편집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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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사진= 이한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