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병 유전자 잘라내는 가위 미국도 상용화... 희소병 치료 문턱 낮출 수 있을까

입력
2023.12.10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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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제비' 英 이어 美 최종 승인
질병 유발 DNA 부위 정밀 절단
치료법 없던 유전병 환자에 희망
약가 상승 부추기고 윤리 우려도

DNA가 인간의 유전정보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지 120여 년 만에 인류가 DNA를 고쳐 질병을 치료하는 시대를 맞았다. DNA에서 원하는 부분을 '편집'하는 '유전자 가위' 기술을 치료제로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현대의학의 질병 정복에 새로운 패러다임이 열릴 거란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큰 기대만큼 과제도 적지 않다. 정부 규제, 생산 인프라, 치료제 가격 등 신기술을 둘러싼 우려와 해법에도 관심이 쏠린다.

미국 식품의약국(FDA)은 자국 바이오 기업 버텍스 파마슈티컬스와 크리스퍼 테라퓨틱스가 공동 개발한 유전자 가위 치료제 '카스제비(미국명 엑사셀)'에 8일(현지시간) 품목허가를 내줬다. 지난달 영국에 이은 두 번째 허가다. 이로써 카스제비는 최신 유전자 가위 기술인 '크리스퍼(CRISPR)' 기반의 첫 신약으로 영국과 미국 의료현장에서 쓰이게 됐다.

유전자 가위=안내 물질+효소 단백질

크리스퍼는 2020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혁신적인 기술로, 정확한 명칭은 '크리스퍼 캐스9(CRISPR-Cas9)'이다. '캐스9(Cas9)'은 DNA를 잘라낼 수 있는 효소 단백질이다. 이를 DNA의 특정 위치로 데려다주는 안내 물질(가이드 RNA)과 결합시켜 세포 안에 넣으면, 가이드 RNA가 가리키는 위치를 캐스9이 정밀하게 절단한다. 절단된 DNA가 자연 복구되는 과정 중에 다른 유전자를 끼워 넣을 수도 있다. 유전자의 원하는 부위를 제거하거나 필요한 유전자를 삽입해 질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카스제비는 마땅한 치료법이 없는 흑인 유전병인 겸상 적혈구 빈혈증 치료에 이 기술을 적용한 약이다. 미국에서 환자가 10만 명 정도로 보고된 이 병은 혈액 속 헤모글로빈이 유전자 변이에 따라 낫 모양으로 변하면서 심한 혈류 방해, 뇌졸중, 장기 부전 등을 일으킨다. 카스제비는 환자에게서 줄기세포를 추출해 낫 모양 헤모글로빈을 생성하는 특정 유전자(BCL11A)를 제거한 뒤 다시 환자의 몸에 주입하는 방식이다. BCL11A가 없는 유전자로만 이뤄진 줄기세포가 몸 안에서 자라면 낫이 아닌 원반 모양의 정상 헤모글로빈이 지속해서 생성된다.

카스제비는 겸상 적혈구 빈혈증 치료용이지만, 가이드 RNA가 가리키는 표적 유전자를 바꿔 설정하면 다양한 질병에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를 응용할 수 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프리시던스 리서치 기준 세계 유전자 편집 시장 규모는 올해 80억4,000만 달러(10조6,000억 원)에서 연평균 15.7% 성장해 2032년에는 299억3,000만 달러(39조5,000억 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후속 임상시험들도 활발하다. 헬스케어 컨설팅업체 아이큐비아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20개 기업에서 39건의 임상이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혈액학(14건)과 항암(16건) 분야가 많다. 진행 중인 임상의 약 59%는 1상 단계인 것으로 파악된다.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최신 기술이라 선두그룹과 격차가 크지 않은 만큼, 국내에서도 상용화 연구가 활발하다. 유전자 가위 관련 다수 특허를 보유한 바이오 기업 툴젠은 이 기술을 적용해 희소질환인 샤르코-마리-투스병 치료제를 개발 중이다. 진코어는 유전자 가위 플랫폼으로 신경세포 기능 저하를 치료하는 기술을 개발할 계획이다.

다른 의도로 유전자 편집한다면...

크리스퍼 유전자 가위는 개발된 지 약 10년밖에 안 된 만큼 아직 기술적 한계가 적지 않다. 이를테면 실제 치료용으로 상용화할 만큼 이 기술을 정밀하게 다룰 수 있는 고급 인력이 소수다. 그러니 개발 속도를 끌어올리는 데 제한이 있고, 개발사는 약가를 높게 책정하게 된다. 카스제비의 경우 치료 비용이 220만 달러(29억 원)에 달한다. 유전자 가위로 치료하려는 질병도 아직은 유전병 같은 희소질환에 한정되는 경향이 있다.

유전자를 직접 다루는 신기술이다 보니 규제기관으로부터 안전성과 유효성을 넘어 생명윤리 측면에서 엄격한 가이드라인 준수를 요구받는다. 혹시 모를 부작용이 나타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데다, 치료 외에 다른 목적으로 유전자를 편집하는 시도가 나타날까 우려돼서다. 적절한 규제를 병행하되 개발을 늦추진 말아야 한다는 시각과, 어떤 부정적 영향이 생길지 모르니 조심스럽게 발전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공존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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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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