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월한 정치 감각과 전략가로서의 링컨

입력
2023.12.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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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링컨의 ‘사면 재건 포고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1861~1865) 중이던 1863년 1월 노예해방선언과 11월 게티즈버그 연설로 깊이 각인된 탓에 빼어난 정치인이자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된다. 63년 12월 8일의 ‘사면 재건 포고령'은 그의 그런 면모를 엿볼 수 있는 좋은 예다.

내전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무렵이었다. 링컨은 남부 진영 유력자들을 상대로 항복 후 몇 가지 조건만 수용하면 사면과 지역 재건 및 토지와 주택 등 재산권(노예소유권 제외)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그는 주별 유권자 10%만 연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면 새로운 주정부 구성을 허용하고, 노예 자유만 인정하면 해방 노예의 지위에 대한 자결권도 보장했다. 다만 남부 동맹군 지도부와 남부로 이탈한 연방 의원, 전쟁범죄자는 예외였다.

노예해방선언이 남부 흑인 노예들의 전선 이탈과 북부 흑인들의 결집을 겨냥한 정치적 묘수였다는 일부 해석이 있지만, 저 포고령이야말로 남부의 전력(戰力)을 분열-와해하고 내전을 조기 종식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막대한 전쟁비용으로 허덕이던 남부 재력가들은 토지 등 재산권을 회복시켜 준다는 약속만으로도 상당수가 동요했다. 내전은 65년 최종 종식됐지만 남부 점령지역들은 전쟁 중에 차례로 재건됐다. 당시 부통령이던 앤드루 존슨이 총독으로 임명된 테네시주는 64년 노예제를 종식시켰다.

그의 파격적이고도 유화적인 선언에 북부 급진 공화당원들은 당연히 반발했다. 노예해방운동가 프레더릭 더글라스는 링컨의 정치적 타협을 ‘선택적 악’이라며 비난했다. 64년 2월 의회는 ‘웨이드-데이비스 법안’을 가결했다. 남부 유권자의 50%가 연방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고 주정부가 흑인 참정권을 인정해야만 연방 재가입을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링컨은 서명을 끝내 거부함으로써 법안을 폐기시켰다. 65년 4월 그가 암살되면서 내분이 재현됐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