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는 2차대전 나치 홀로코스트 최대 피해국 중 한 곳이다. 당시 폴란드는 동유럽 최대 유대인공동체를 둔 국가로 전체 인구(3,300만 명)의 약 10%가 유대인(330만 명)이었다. 그들 폴란드 유대인은 1939~1945년 사이 약 300만 명이 아우슈비츠 등 멸절수용소에서 살해당하거나 바르샤바 등지의 게토에서 굶어 죽었다.
나치의 유대인 집단 학살 뉴스는 1942년 6월 폴란드 망명정부에 의해 처음 세상에 폭로됐다. 망명정부는 연합군에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이어지는 철도 파괴 등을 요청했지만, 영미 연합군의 전시 작전 우선순위에서 밀렸던지 ‘정보’ 자체의 신뢰성에 무게를 두지 않았던지, 연합군은 그 요청을 묵살했다.
1942년 9월 ‘폴란드 재건을 위한 가톨릭 전선’ 활동가 겸 작가 조피아 코사크(Zofia Kossak)와 중도 정치인 완다 필리포비츠(Wanda Filipowicz)가 지하 팸플릿을 통해 나치의 저 만행을 폭로하고 “야만에 침묵하고 방관하는 것은 야만에 동조하는 행위”라며 폴란드 시민들의 직접 행동을 촉구하고 나섰다. 직후인 1942년 12월 4일, 바르샤바에 본부를 두고 여러 지역에 지부까지 둔 지하조직 ‘제고타 위원회’(Zegota Council)가 설립됐다. '제고타'는 일종의 암호명으로, 공식 명칭은 유대인 원조위원회였다.
유대인보다는 사정이 나았지만 나치 치하 슬라브계 폴란드인 역시 ‘2등민족’으로 분류돼 강제노역 등에 동원됐다. 그들은 노역장으로 이동하는 길에 게토 담장에 음식물이나 약품 등을 은밀히 놓아두는 식의 수동적인 도움에서부터 유대인 은신처를 마련해 운영하거나 그들의 제3국 탈출을 돕는 등 적극적인 활동으로 수많은 유대인을 구조했다. 레지스탕스 군사작전 못지않게 위험한, 목숨 건 활동이었다. 적발되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 때로는 마을 주민 전체가 처형당할 수 있는 일이었고, 실제로 상당수가 그렇게 희생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