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굴을 먹은 역사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간다. 선사시대의 조개무지 대부분이 굴로 이루어져 있을 정도로 우리 조상들은 조개류 중에서도 특히 굴을 즐겨 먹었다. 또한 조선시대의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동해안을 제외한 7도에서 굴은 중요한 토산물로 지정되어 있다.
굴은 '석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돌 석(石)'과 '꽃 화(花)'를 합쳐 바닷가 바윗돌에 핀 꽃이라는 뜻이다. 석화에 관련하여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조선시대 진묵대사가 망해사에 있을 때의 일이다. 진묵대사는 배가 고프면 해산물을 채취하여 먹곤 하였는데, 하루는 허기를 채우고자 굴을 따서 먹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지나가는 행인이 왜 중이 육식을 하느냐고 시비를 거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이것은 굴이 아니라 석화라고 대답해 위기를 모면한다. 이후로 굴을 석화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예로부터 '보리가 피면 굴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속담이 있다. 보리가 피는 따듯한 계절은 굴이 산란기를 맞아 독을 품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굴은 바닷물이 차가워지는 9월부터 12월까지 제철을 맞는다. 이때의 싱싱한 굴은 어떤 조리 없이 생으로 먹어도 입안 가득 진한 바다의 향을 맛볼 수 있다. 서양에서는 생굴에 레몬즙을 꼭 곁들여 먹는다. 레몬의 비타민C가 굴의 철분 흡수를 돕고, 굴에 함유된 타우린 성분의 손실을 막아주기 때문이다.
서양에서는 주로 생굴로 즐기는 반면, 우리는 굴을 다양한 요리로 즐겼다. 특히 조선시대부터 겨울철이면 다양한 굴요리가 임금님의 수라상에 올랐다. 그중 하나가 '어리굴젓'이다. 과거에는 섬에서 채취한 굴을 곧바로 팔지 못한 경우, 오래 보관하기 위해 굴을 염장했다. 굴을 소금과 함께 보름 정도 삭힌 후에 고춧가루와 섞어 빨간 어리굴젓을 만들었다. 어리굴젓은 다른 굴젓과 다르게 소금 간을 약하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간이 덜 된 모자람을 뜻하는 '어리다'를 붙여 어리굴젓으로 불린다는 이야기가 있다. 반면에 맵다는 뜻의 '얼얼하다' 또는 '어리하다'라는 사투리가 붙어 어리굴젓이 되었다는 상반된 이야기도 존재한다. 새빨간 고춧가루에 걸쭉하게 무쳐 놓은 어리굴젓을 보면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싶다.
겨울철 김장 시기에도 굴은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다. 1795년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임금님 수라상에 '석화잡저'가 올라왔다는 기록이 있다. 석화잡저는 굴을 넣고 담근 섞박지를 뜻한다. 납작하게 썬 무와 갖은 재료를 섞어서 먹는다고 하여 붙여진 섞박지에 싱싱한 굴을 넣은 김치가 당시에 임금의 입맛까지 사로잡은 모양이다.
굴은 익혀 먹어도 그 맛이 일품이다. 특히 국물요리에 굴을 넣으면 시원함이 몇 배나 깊어진다. 굴에 함유된 타우린 성분이 감칠맛을 내주기 때문이다. 특히 '미역굴국밥'은 라면처럼 쉽게 만들 수 있지만 풍부한 영양과 깊은 맛을 자랑한다. 멸치육수에 미역을 넣고 팔팔 끓이다가 파, 마늘, 간장으로 간을 맞춘다. 여기에 두부와 깨끗하게 손질한 굴을 한 움큼 넣으면 완성이다. 기호에 따라 소금 간으로 깔끔하게 마무리하거나 칼칼하게 청양고추를 듬뿍 넣어도 좋다. 땀을 뻘뻘 흘리며 한국인만이 알 수 있는 '시원한 맛'을 온몸으로 느끼고 나면 환절기 불청객인 감기 기운도 거뜬히 물리칠 수 있다. 겨울 바다가 키워 낸 굴이 선사하는 깊은 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