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정부가 청소년의 원하지 않는 임신과 출산을 줄이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미성년자의 피임 접근성을 높여 어쩔 수 없이 부모가 되는 일을 막겠다는 취지다. 동남아시아에서 미성년자의 임신·출산율이 가장 높은 필리핀은 연간 8,000억 원에 달하는 사회적 비용을 치르고 있다. 특히 소녀들이 고등교육 기회를 박탈당해 저소득 일자리를 전전하다 빈곤을 대물림하는 등 피해를 뒤집어쓴다.
30일 필리핀스타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필리핀 상원은 다음 달 ‘청소년 임신 예방법’의 입법을 추진한다. 15~18세 청소년이 부모의 동의 없이 경구 피임약을 구입하고 복용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이 핵심이다. 현재는 이들이 피임약을 사려면 부모나 법적 보호자의 서면 동의가 필요하다.
인구 5명 중 4명이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에서는 임신중지(낙태)와 피임이 금기이고 이른바 ‘순결’이 청소년의 필수 덕목으로 여겨진다. 종교가 미성년자의 성관계를 인정하지 않으니 피임약 접근은 불가능하다.
가톨릭 교계는 "피임약 허용이 미성년자들의 분별없는 성행위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필리핀 가톨릭교회 관계자는 미국 보이스오브아메리카에 “교회는 자연 피임 방법만 허용하며 10대에 권장되어야 할 유일한 피임법은 금욕”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통제는 통하지 않았다. 유엔인구기금(UNFPA)은 매년 15~19세의 필리핀 여성 1,000명 당 47명이 출산한다고 본다. 하루에 500명 이상이 아이를 낳는 꼴이다. 지난해엔 법적으로 성관계에 합의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갖췄다고 보는 최소 연령을 12세에서 16세로 90년 만에 올렸지만, 10~14세 소녀 2,000명이 임신한 것으로 조사됐다. 감당하기 어려운 임신을 해도 임신중지가 불법이라 출산을 피할 수 없다. 소녀들이 성관계의 책임을 떠안는 셈이다.
결국 정치권도 청소년의 임신과 출산을 줄이려면 피임약 허용이 불가피하다고 결론 내렸다. 레이라 주단 UNFPA 필리핀 대표는 로이터통신에 "적어도 15세 이상이면 피임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상원에서 법안이 통과되면 필리핀 10대 소녀들은 임신·출산에 대한 최소한의 자기결정권을 갖게 된다. 이른 나이에 부모가 된 청소년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을 강화하고 출산 후 관리와 성폭력 상담을 담당하는 기구를 설치하는 내용도 법안에 들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