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침(1672~1743)은 과거 급제자 및 고위 관료가 즐비한 명문가 출신이다. 불행하게도 다섯 살에 천연두를 앓다가 시력을 완전히 잃었다. 부모가 불쌍히 여겨 공부를 그만두게 하자 이렇게 말했다. “책을 버리는 것은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눈에 병이 들어 눈을 버린 것은 어쩔 수 없지만, 마음은 병들지 않았는데 마음마저 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아들의 설득에 마음을 돌린 아버지는 직접 글을 가르쳤다. 일단 글을 깨치자 경전과 역사, 제자백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책을 섭렵했다. 전부 남이 읽는 소리를 들으며 공부한 결과다. 김성침은 공부를 게을리하는 이들을 훈계했다. "내가 한쪽 눈이라도 온전했다면 무슨 책인들 읽지 않았겠느냐. 너희들은 두 눈이 멀쩡한데 책을 읽으려 하지 않으니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
김성침의 아내 홍씨 역시 세 살에 병을 앓아 시력을 잃었다. 처음 혼담이 오갈 때는 양가가 모두 망설였다. 부부 중 한 사람이라도 장애가 없어야 상대를 보살필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리라. 부모의 염려와 달리 당사자들은 흔쾌히 동의했다. 김성침은 "두 사람 모두 장애가 있으니 기이한 인연입니다"라고 했다. 홍씨도 "모든 일에는 분수가 있으니 분수를 따르겠습니다"라고 찬성했다. 혼인한 뒤 김성침은 아내에게 소학, 시경, 논어, 맹자를 가르쳤다. 부부는 함께 글을 외고 토론하며 시를 지어 주고받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부부는 일흔이 넘도록 해로하고 아들딸 하나씩을 두었다.
김성침은 저서로 문집 '잠와집'을 남겼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부친의 생애를 기록한 글의 초고가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문장이 평이하고 자연스러워 시력을 잃은 사람이 지었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김성침은 담담한 서술 끝에 이렇게 덧붙였다. "내가 장애가 있다고 이 글을 짓지 않을 수는 없다." 이 밖에 젊은 시절 지었다는 '회선요'라는 시가 전한다. 그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원래 세상을 싫어하는 사람, 어릴 적부터 신선 세계 그리워했네." 그가 신선 세계를 염원한 것은 신체적 장애에 구애받지 않는 세상이기 때문이리라.
신체적 장애를 지니고도 성취를 이룬 인물들의 이야기는 많다. 대개는 허구와 과장이 섞여 있다. 하지만 김성침의 이야기는 여러 문헌에서 교차 증명되는 사실이다. 신체적 장애가 불편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마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을지도 모른다. 김성침이 염원하던 신선 세계는 상상의 영역이지만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세상은 더 이상 상상의 영역에 둘 수 없다. 상상을 현실로 구현하는 것은 기술의 발전이라지만, 장애가 장애되지 않는 세계는 사회구성원의 동의와 협력으로도 충분히 구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