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은 살아남았지만

입력
2023.10.05 18:00
26면
정치쇄신 계기 될 수 있었던 영장심사 
논리적으로도 이해되지 않는 기각 사유
같은 양상 되풀이될 정치에 기대 어려워


하나 마나 한 얘기지만 판사도 평범한 인간이다. 각자가 다른 선험적 성향을 갖고, 환경과 분위기에 영향받는다. 이를 인정하면서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한 영장기각 사유는 내내 마음에 걸린다. 판사가 어떻게 결론 내리든 그에 닿는 논리는 합리적이고 정교해야 한다. 그 논리 전개가 어색해 보이는 것이다. 요약하면 세 혐의 중 하나(대북송금)는 다툼의 여지가 있되, 둘은 혐의가 확실하거나(위증교사) 의심이 가는(백현동) 걸로 정리됐다.

문제는 전부 배척한 증거인멸 우려에 관한 논리다. 위증교사는 혐의가 분명하고, 백현동은 웬만큼 수사가 이뤄져 증거인멸의 의미가 없다는 건 그렇다 치자. 대북송금 건에서 이화영의 진술변화에 피의자가 직접 개입했는지는 불분명하다는 설명은 증거인멸 판단과 별 관계없는 사족이다. 분명한 건 피의자가 과거에 분명 증거인멸(위증교사) 시도를 했지만 앞으론 염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모순적 비약 사이에 설명은 없다.

핵심은 ‘피의자가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의 대상’이므로 증거인멸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대목이다. 힘을 가진 권력자일수록 증거인멸은 더 용이하다는 점에서 이건 더 비논리적이다. 일반 피의자라면 이 정도의 혐의와 증거인멸 전력들을 달고 구속을 면키는 어렵다. 이 대표가 명분 체통 다 내던지고 절박하게 구명에 매달린 행태는 율사인 그 스스로도 구속 가능성을 높게 보았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의는 여기까지다. 법으로 부여받은 최종 판단자로서 판사의 권위를 더 부정하는 건 온당치 않아서다. 그러면 모든 갈등과 싸움을 종결할 기준이 사라져 국가유지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그래도, 못내 안타까움은 남는다. 어떤 형태로든 그의 정치적 물러섬이 파행적 정치판에 숨통을 틔우는 결정적 계기가 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론적으로 정당은 정권의 획득을 목표로 하는, 뜻을 함께하는 결사체다. 그 뜻은 집권을 통해 달성코자 하는 이념과 가치, 정책의 방향이다. 민주당은 이런 정상적인 정당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제대로라면 대선 직후 실패 요인을 성찰하고, 당의 체질을 재정비해 국민의 마음을 다시 얻는 데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당연한 수순을 밟았으면 윤석열 정권의 낮은 지지도를 감안할 때 민주당의 입지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개딸에 얹혀가는 모습이 아니라 중도층까지 대거 끌어들여 국민적 신뢰자산을 확실히 쌓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적 진보정당으로서의 이념과 가치는 이재명 개인의 사법적 구명과 보위 목적으로 대체됐다. 공당이 사법부에 영장기각을 압박하고, 반란자 색출과 응징에 광분하는 행태는 그 절정이다. YS, DJ의 야당 시절에도 사당(私黨) 논란이 있었지만 그들은 대체불가의 거대 히스토리를 쌓은 인물들이다. 공당이 지키고 공유해야 할 이념 가치보다 이재명에게서 두드러지는 건 남다른 권력의지다.

이제 정치판은 지난 1년 반과 똑같은 양상으로 전개될 것이다. 이재명 구명에 앞장섰던 낡은 인식의 인물들이 똑같은 정치행태를 계속하며 다시 총선에 등장할 것이다. 민주당의 환골탈태가 윤 정권의 변화도 견인하리라는 기대도 물 건너갔다. 그래도 워낙 귀 닫고 독주하는 윤 정권에 대한 견제심리로 제1당을 고수하게 될지는 모르겠다. 그럼 뭐 하나. 정치적 보신만 좇는 이들로 여전히 채워질, 다시 파행적 정치게임판에서 무슨 미래의 희망을 볼 것인가.

법적 판단은 판사의 소신에 따른 것이나 그 무게는 종종 시대적 흐름을 좌우할 만큼 무겁다. 이렇게 이재명 개인은 살아남았고, 새 정치에 대한 희망은 아득히 사라졌다.

이준희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