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은 실체적 진실을 추구해서 정의를 구현하는 절차다. 하지만 증거와 절차를 둘러싼 쟁점이 재판을 좌우하는 경우도 많다. 유능한 변호사는 증거·절차를 파고들어서 유죄가 분명해 보였던 재판에서 피고인을 무죄로 석방시키기도 한다. 그러면 검사는 허탈감에 빠지고 피고인은 변호사와 얼싸안고 좋아한다. 그런 모습을 보면 과연 재판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하는 회의감마저 생긴다. 로스쿨 재학 시 로펌 인턴을 하면서 그런 모습을 본 한 미국 학생은 자신은 변호사를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교수가 돼서 저명한 법학자로 이름을 남겼다. 몇 년 전 타계한 데보라 로드 교수가 바로 그이다. 스탠퍼드 로스쿨에서 법조윤리를 오랫동안 가르친 데보라 로드는 정의를 구현해야 할 법률가의 소명과 의뢰인을 대변해야 하는 변호사의 역할을 두고 고민했던 훌륭한 법학자였다.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유죄판결을 내린 최강욱 전 의원에 대한 재판도 실체적 진실보다는 검찰에 제출된 PC가 증거로 쓰일 수 있나 하는 증거·절차법 문제가 쟁점이었다. 검찰이 증거를 수집하는 과정에 불법이 있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재판에 영향을 미친다. 증거 수집에 있어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나오더라도 무죄는 무죄다. 하지만, 이처럼 증거·절차법상의 기술적 이유를 근거로 무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국회의원이나 장관이라면 그가 마냥 좋아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을 갖고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선출직이며 고위공직자일뿐더러 증거·절차법상의 기술적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유죄이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은 물론이고 정당을 이끌어 나가는 당대표, 정책을 결정하는 장관, 그리고 지자체를 이끄는 단체장은 이런 국면에 처하기 전에 자리에서 물러나는 게 원칙이다. 물론 그대로 지나쳐 지나가는 수도 있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제가 공론화되면 현실적으로 이들이 직위를 유지하면서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는 불가능하고, 이들이 속한 조직은 기능마비에 빠질 수 있다. 물론 대법원의 유죄확정 판결이 있기까지는 무죄로 추정된다는 원칙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일반인이 갖고 있는 소송법상의 권리이지 중요한 공적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 이들이 직위를 유지하는 논리가 될 수는 없다.
1969년 봄, 미국 대법원을 심각하게 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진보적 성향으로 이름이 높은 에이브 포타스 대법관이 재직 중에 기업인이 운영하는 재단과 자문계약을 하고 2만 달러를 받았음이 언론 보도로 드러난 것이다. 당시에는 공직윤리 규칙이 느슨해서 포타스가 법률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공화당 의원들은 탄핵을 거론하는 등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이에 얼 워렌 대법원장은 포타스 대법관에게 사퇴할 것을 권했고 포타스는 사직을 했다. 워렌 대법원장은 대법원의 권위와 명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이 아꼈던 후배 대법관에게 사직해 줄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선 전 정권 인사를 상대로 한 검찰 수사가 남용되더니, 이제는 민주당 의원에 대한 재판과 당대표를 겨냥한 수사와 기소로 나라 전체가 시끄럽다. 당사자들은 증거·절차법과 무죄추정원칙에 매달리고 있고, 이로 인해 국회와 정당의 권위와 명예는 천길 나락으로 추락해 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우리 국회와 정당은 지켜야 할 권위도 명예도 없는 조직 같다. 대법원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후배 대법관에게 사임을 권한 얼 워렌 같은 어른도 우리 주변에선 찾아볼 수 없다. 어쩌다가 이런 지경까지 왔는지 착잡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