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중국해 영유권을 놓고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 국가들과 대립해 온 중국이 갑자기 협력을 강조하며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다. 미국이 중국 턱밑인 동남아에서 노골적으로 외교·안보 공조에 나서자, 대응을 위해 ‘앞마당 관리’에 들어간 측면이 크다.
7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리창 중국 총리는 전날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세안+중국 정상회의'에서 “중국과 아세안은 떨어질 수 없는 좋은 이웃이자 형제, 동반자”라며 “양측의 운명공동체를 더욱 긴밀하게 구축하자”고 밝혔다.
리 총리는 또 아시아 국가들 간 오랜 우호 역사를 언급하며 경제·문화 분야의 연대를 공고히 하자고 말했다. 그러면서 △산업·공급망 협력 확대 △전기차 등 신산업 분야 협력 강화 △남중국해 행동 준칙 마련 협의 △인문교류 확대 등을 제안했다.
이어 리 총리는 팜민찐 베트남 총리와 양자 회담을 가졌다. 베트남 언론 VN익스프레스는 “두 총리가 고위급 인사 교류 정례화에 합의했다”고 전했다. 같은 시각, 중국 공산당 대외연락부의 류젠차오 부장(장관급)도 베트남 하노이를 찾아 응우옌푸쫑 공산당 총비서(서기장)를 만났다. 이들은 양국의 상호 정치 신뢰를 공고히 하고 협력을 강화하기로 약속했다.
이 같은 중국의 ‘동남아 스킨십’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베트남 등 아세안 몇몇 국가와 마찰을 빚던 종전과는 뚜렷이 대비된다. 그동안 중국은 남중국해에 알파벳 유(U)자 형태 9개 선(남해구단선)을 긋고 대부분을 자국 영해라고 주장해 왔다. 이에 대해 2016년 국제상설재판소(PCA)가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지만, 중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다.
특히 지난달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 대부분을 자국 영해로 표시한 새 공식 표준 지도를 공표하면서 해묵은 이슈가 또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베트남과 필리핀, 말레이시아는 거세게 반발했으나, 중국은 별다른 반응 없이 ‘마이웨이’를 이어가고 있다. 갈등 해결을 위해 상호 간 한 발짝도 다가가지 못한 상황에서, 불씨를 댕긴 장본인이 생뚱맞게 협력 의지를 피력한 셈이다.
중국의 이런 행보는 아세안에서 대중국 견제 수위를 높이는 미국을 겨냥한 행보로 풀이된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10일 베트남을 방문할 예정이다. 경제 협력 위주의 포괄적 동반자 관계에서 국방·외교 관계도 망라한 포괄적·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미·베트남 관계를 격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트남과의 밀착을 통해 아세안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키우는 동시에, 중국을 코앞에서 견제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다.
바이든 대통령 대신 아세안 정상회의에 참석한 카멀라 해리스 미 부통령도 6일 동남아 내 ‘최대 우방’으로 꼽히는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주니어 대통령과 만나 “미국은 남중국해 문제 해결을 위해 한층 더 노력하겠다”고 약속했다. 개입 수위를 좀 더 높이겠다는 뜻이다.
이러한 분위기를 의식한 듯, 리 총리는 7일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에서 “지역 협력을 우선 순위에 놓고 각종 외부 방해를 제거해 보편적 발전의 길을 개척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며 "어려움에 부딪힐 때일수록 함께 단결하고 협력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외부 방해’는 미국을 의미한다.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일부 (아세안) 당사국이 미국과의 군사적 공조에 나서고 미국이 영향력을 키워가자 중국이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신호”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