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은 어떤 강대국의 대리인도 되지 않는다. 이곳을 파괴적인 경쟁의 장으로 만들지 말라.”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은 5일 수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43차 아세안 정상회의 개막식에 참석해 이같이 말했다. 동남아시아를 둘러싼 미국과 중국 간 패권 다툼이 격화하는 상황에서, 그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겠다는 아세안의 공개 선언이었다.
그러나 국제사회에서 아세안의 존재감은 옅어져만 가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균형 외교’를 이유로 남중국해 문제 등 주요 현안들에는 입을 꾹 다물고만 있는 탓이다. 다만 아세안 정상들은 이날 쿠데타 정권을 압박하는 차원에서 차기 의장국에서 미얀마를 배제하기로 했다.
오는 7일까지 이어지는 이번 정상회의에는 미얀마를 제외한 아세안 회원국 9개국 정상과 한국, 중국, 일본 등 22개국 정상급 인사가 참석했다. 주제는 ‘아세안의 중요성: 성장의 중심지’로, 동아시아 정상회의(EAS)도 함께 열린다.
최대 관심사는 아세안이 남중국해 갈등에 대해 어떤 목소리를 내느냐다. 필리핀과 베트남, 말레이시아 등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중국과 10년 넘게 대치해 왔다. 지난달 28일에도 중국 정부가 남중국해 대부분을 자국 영토로 표기한 새 지도를 공개하자, 이들 3국은 “국제법상 근거가 없다”고 반발했다. 갈등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아세안의 대응은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회원국 해상 주권이 위협받는 데다, 중국이 물대포와 레이저 공격에 나서면서 물리적 피해마저 속출하고 있는데도 변함이 없다. 중국과의 분쟁 확대를 막기 위해 2018년 ‘남중국해 행동강령(COC)’을 제정하기로 했지만 5년 동안 제자리걸음이다. 정상회의 첫날인 5일에도 남중국해 관련 논의는 진행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아세안의 ‘침묵’은 자칫 중국을 비난했다간 ‘중립성 위반’이라는 비난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된다. 캄보디아와 라오스 등 친(親)중국 성향 국가의 반발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불합리한 행태를 보고도 묵인하는 아세안의 비겁함을 꼬집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아시아 정치 전문가인 리처드 헤이다리안 필리핀대 교수는 “미국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거리가 먼 한국과 인도조차 필리핀과 연대하는데, 동남아 평화·안보 주체가 돼야 할 아세안은 눈에 띄게 조용하다”며 아세안의 행보를 ‘귀청 떨어지게 하는 침묵(deafening silence)’이라고 비꼬았다.
좀처럼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는 미얀마 폭력 사태도 해묵은 난제다. 아세안은 내정 불간섭을 이유로 미얀마 상황을 사실상 방관하고 있다. 2021년 2월 쿠데타 이후 폭력 중단 등을 촉구하고 있지만, 별다른 제재는 없는 탓에 군부의 만행은 이어지고 있다. 대응 방식이 바뀌지 않는 한, 이번 회의에서도 뾰족한 해법은 나오지 않을 전망이다.
다만 이날 정상들은 미얀마를 아세안 의장국에서 빼기로 결정했다. 회원국의 알파벳 순서로 매년 의장국을 맡는 관행에 따르면 2026년 의장국은 미얀마가 돼야 하지만 필리핀에 넘긴 것이다. 3년이나 남은 의장국을 놓고 미얀마를 배제하며 압박하는 것은 아세안 국가들이 '미얀마 사태'에 손을 놓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차원으로 보인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불참도 아세안 정상회의의 중량감 하락을 방증하는 요인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사이에 둔 미중 간 경쟁으로 개별 국가들의 지정학적 위상은 연일 높아지는 반면, 정작 이들을 하나로 묶는 아세안은 시야에서 사라지고 있다는 얘기다.
전문가들은 ‘존재 가치’ 입증이 아세안의 새로운 도전 과제가 될 것이라고 본다. ‘아세안을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불리는 마티 나탈레가와 전 인도네시아 외무장관은 AP통신에 “아세안 회의가 효과를 보이지 못하면 점점 더 적은 수의 지도자가 (정상회의에) 참석할 것”이라며 “아세안 주목도가 약해지는 게 가장 큰 걱정”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