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귀를 가진 동·서양의 두 임금님

입력
2023.08.31 19:00
25면

편집자주

'삼국유사'는 함께 읽어 즐겁고 유익한 우리 민족의 고전이다. 온갖 이야기 속에는 오늘날 우리 삶의 모습이 원형처럼 담겼다. 이야기 하나하나에 돋보기를 대고 다가가 1,500여 년 전 조상들의 삶과 우리들의 세계를 함께 살펴본다.


아폴론에 이의 제기한 미다스 왕
왕권 수호에 노심초사한 경문왕
‘당나귀 귀’ 두 왕의 가여운 운명

그리스 신화의 미다스(Midas) 왕과 신라의 제48대 경문왕(861~875 재위)은 둘 다 ‘당나귀 귀’를 가진 왕이다. 그들은 어쩌다 당나귀 귀를 갖게 됐을까? 당나귀 귀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두 사람 이야기를 비교해 읽다 보면 닮은 듯 다른 두 운명과 마주친다.

‘가여운 미다스’라는 말이 있다.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지만 정작 속을 들여다보면 불운하고 가난한 사람’을 가리킨다. 손만 대면 금으로 변했다는 미다스 왕에게서 나온 말인데, 왜 황금이 불운과 가난으로 이어졌을까. 본디 미다스는 인자하고 친절한 왕이었다. 그래서 디오니소스로부터 ‘황금의 손’을 선물받았다. 거기까지는 운이 좋았다.

하지만 변하지 말아야 할 것까지 변하면서 사태가 심각해진다. 미다스의 손이 닿자 차갑게 굳어버린 아내와 딸, 무거운 머리를 늘어뜨린 장미, 딱딱한 음식과 음료… 이런 것들이 황금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불안과 공포가 미다스 왕을 덮쳤다. 디오니소스가 자비를 베풀어 마법에서 겨우 벗어난 미다스는 다시 허황한 꿈을 꾸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그런데 진짜 불운은 그다음에 찾아왔다. 태양신 아폴론의 리라(고대 그리스의 현악기), 목신(牧神) 판(Pan)의 피리가 경연을 하는 자리에 주제넘게 나선 게 화근이었다. 모두 아폴론을 칭송하는데, 오직 미다스만 판의 편을 들었다. 화가 난 아폴론이 내린 벌이 당나귀 귀였다. 제대로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다. 당나귀 귀는 형편없는 자의 표시였다. 미다스는 당나귀 귀를 한사코 숨겼고 오직 이발사만이 그것을 알았는데, 회유와 협박으로 비밀을 지키던 이발사는 참다못해 외딴 시골 깊은 곳 개울가에 구덩이를 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쳤다. 마침 구덩이에서 자란 작고 여린 갈대가 산들바람에 맞춰 따라 했다. 강둑 언저리의 골풀과 잔디가 이어받고, 삼나무와 버드나무가 윙윙거리며 소리를 키워 나갔다.

신화 연구자 미하엘 쾰마이어는 ‘화가 난 미다스 왕이 판을 통해 이발사를 죽였다’고 했다. 그러나 스티븐 프라이는 다르게 썼다. 치욕을 감당 못한 미다스가 스스로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는 것이다. 정녕 ‘가여운 미다스’이다.

미다스 왕이 ‘삼국유사’에 오면 경문왕이다. 선왕(헌안왕)은 먼 조카인 그가 어질다는 사실을 잘 알았고, 두 딸에게 모두 수발들도록 하면서 왕위가 그에게 가도록 했다. 경문왕은 성품이나 행실이 미다스 왕을 닮았다. 왕위는 물론 선왕의 딸 둘을 모두 왕비로 맞는 경사가 겹친다. 그런데 미다스처럼 경사는 거기까지였다.

왕이 된 후 그의 침소에 저녁마다 많은 뱀이 모여들었다. 궁인이 놀랍고 두려워 쫓아내려 하자 왕은 도리어 ‘뱀이 없이는 편안히 잠을 잘 수 없으니 막지 말라’고 한다. 매번 침상에서 혀를 날름거리며 왕의 가슴 위를 가득 덮었다는 이 뱀의 정체는 무엇인가. 때는 저무는 신라 말기였다. 왕위에 올랐지만 견고하지 못한 권력이 늘 그의 신변을 위협했고, 궁인조차 믿지 못하니 아마 사병(私兵)을 곁에 두어 스스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되었으리라. 뱀은 곧 왕의 사병인 것이다.

진짜 불운은 미다스처럼 그다음에 찾아왔다. 귀가 갑자기 커져 당나귀 귀 같아진 것이다. 귀를 끝까지 감추려고 한 까닭 또한 미다스의 그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이 사실을 안 사람은 두건 만드는 기술자였다. 평생 비밀을 지키던 기술자는 죽을 무렵, 도림사(道林寺)의 대나무 숲 가운데 아무도 없는 곳에 들어가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같다네.” 바람이 불 때마다 흔들리는 대나무가 확성기로는 제격이다. 그래서 대나무를 베어내고 키 작은 산수유를 심으라 했다나? 명백한 언론 통제다.

미다스 왕의 황금 손은 신들의 주사위에 놀아나는 인간의 운명을 나타내지만, 경문왕은 훨씬 정치적으로 현실화되어 뱀으로 몸을 덮고 산수유로 말문을 막아야만 지켜지는 외로운 권력자의 표상처럼 보인다. ‘가여운 미다스’보다 더 ‘가여운 경문’이 됐다.

고운기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