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3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숨은 주인공은 단연 가수 윤수일의 노래 '아파트'(1982년 발매)다. 극한의 상황에서도 기어코 잔치를 여는 황궁 아파트 주민들 사이, 주인공 영탁(이병헌)은 무대 위에서 '아파트'를 부른다. 영탁은 막춤을 추며 이 경쾌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끔찍한 비밀을 회상한다. 이병헌이 아는 후배에게 직접 '아재춤'을 배우면서까지 열연한 이 장면을 기점으로 영화는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한 번 더 등장하는 이 노래는 영탁의 손으로 죽인 옆집 소녀, 배우 박지후가 부른다. "모든 걸 잃은 공허한 마음을 살리려 했다"는 박지후의 말처럼 처연한 영화의 분위기를 한 번 더 강조하는 장치다.
최근 K콘텐츠 속 노래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단순 감초 역할이 아니라 노래 가사와 분위기가 극의 전개를 암시하고, 캐릭터의 특성을 더욱 돋보이게 하고 있기에 그렇다. 영화 '밀수'에선 가수 최헌의 노래 '앵두'(1978년)가 꼭 그렇다. "믿어도 되나요, 당신의 마음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사랑 노래는 영화에서 배신과 반전의 복선으로 쓰였다. 류승완 감독이 다섯 살 때 나온 이 곡은 그가 시나리오를 쓸 때부터 일찌감치 점찍어 둔 곡이라는 후문이다.
이런 분위기는 영화뿐만 아니라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포착되고 있다. 예능 역시 시즌제로 제작이 자리 잡으며, 기승전결을 갖춘 '서사'가 중요해진 탓이다. 최근 예능은 OST를 직접 제작·발매하는 게 하나의 트렌드가 됐다. 출연진의 캐릭터와 프로그램의 분위기를 담은 곡을 출연진이 직접 부르는 일도 낯설지 않다.
현실판 '부루마불' 게임으로 여행을 즐기는 프로그램인 티빙 오리지널 '브로 앤 마블'은 아이돌 그룹으로 치면 단체곡에 유닛곡까지 발매했다. 모든 출연진이 가창에 참여하도록 분위기를 만든 실질적 리더는 이승기였다. 이승기 주도로 모든 멤버들이 완성도에 심혈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그렇게 탄생한 '유닛곡'엔 게임에 임하는 각 팀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예컨대 세븐틴의 조슈아·호시가 부른 '신기루'는 두 멤버가 프로그램 초반, 사막에서 헤매는 모습에서 시작됐다. 제작진은 "게임에서의 승부욕과 우승에 대한 열망이 누구보다 강하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눈앞에서 실패하는 모습이 신기루 같았다"고 설명했다. "주사위는 손을 떠났네. 신기루가 보인다. 저 멀리 신기루를 향해 닻을 던져"라는 가사는 그렇게 탄생했다.
배우 차태현과 가수 김종국 등 이른바 용띠클럽이 총출동해 주목받은 JTBC '택배는 몽골몽골'도 단체곡 '그리고, 여행은 계속된다(And, Go On)'를 냈다. 배우 강훈을 제외한 모든 멤버가 앨범을 낸 경력이 있다. 김민석 PD는 "처음엔 '강훈만 앨범이 없으니 앨범을 내주자'는 멤버들의 아이디어로 OST를 제작했다"고 귀띔했다. 노래에서 눈에 띄는 건 "찾아갈게 오랜만에 난 TJ"라는 랩. TJ는 배우 장혁의 23년 전 가수 활동명이다. 김 PD는 "몽골 현지 촬영 때는 차 안에서 가장 노래를 많이 부른 출연자가 장혁이었는데, 막상 녹음 결정 이후 가창이 아닌 랩 파트를 자청했다"면서 "금세 TJ의 저력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업계에서도 OST를 직접 제작하면 콘텐츠를 해외에 공개할 때 저작권 제약이 없는 이점이 있어 반기는 분위기다. 티빙 관계자는 "최근 예능도 정규물이 아니라 일정 회차 내 서사를 가진 콘텐츠로 제작돼 노래로 몰입감을 높이려는 추세"라면서 "예능의 소재와 장르가 다양해지는 만큼 OST도 새로운 시도가 계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