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호원 한마디에 스토커 줄행랑… 경찰·민간 '경호 협업' 효과 있었다

입력
2023.08.25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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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민간경호원 지원사업' 시범운영
응답자 전원 "경호에 만족·안전 느껴"

지난달 늦은 밤 서울의 한 주택가. 모자를 푹 눌러쓴 50대 남성 A씨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골목을 서성이고 있었다. A씨는 전 여자친구인 40대 B씨를 기다리던 중. 여자친구가 이별을 통보하자, A씨는 "자살하겠다"는 문자를 30통이나 보내고 염산을 차에 실은 채 주변을 배회하며 B씨를 위협했다. A씨는 한 달간 유치장(경찰의 잠정조치) 신세를 졌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 석방 이후에도 B씨 주변을 배회하며 위협 강도를 높여 가던 중이었다.

그때 B씨를 지키던 민간 경호업체 소속 경호원이 나섰다. A씨가 B씨 담을 넘어가는 모습을 확인한 경호원이 "당신 누구냐"며 용건을 묻자, 건장한 체격의 경호원과 맞선 스토킹 가해자 A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을 쳤다. 사건을 접수한 경찰은 A씨에게 추가 잠정조치 처분을 내리는 한편, 주거침입 혐의로 그를 조사해 검찰에 송치할 예정이다.

지난해 9월 서울 신당역 역무원 스토킹 살인사건 이후 경찰이 예방책으로 내놓은 '민간 경호원 연계 보호 사업'이 가시적 성과를 거두고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범죄 피해자에게 경찰관을 붙이기 어려운 상황에서 경찰이 민간 경호원에게 피해자 신변 보호를 의뢰한 것인데, 범죄 예방 효과와 피해자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민간경호 피해자 90%가 여성

24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은 6월부터 시행된 '고위험 범죄피해자 민간경호 지원사업'을 통해 지금까지 33명의 피해자에게 민간경호를 제공했다. 경호를 받은 피해자 중 30명이 여성이었고 남성도 3명 있었다. 피해 범죄 유형을 보면 스토킹이 절반 이상인 19명이나 됐다.

경찰은 신당역 사건처럼 △구속영장이 기각된 피의자가 접근금지 명령을 위반하거나 재판을 앞두고 위협 수위를 높이는 경우 △위험성 판단 체크리스트에서 '매우 높음' 결과가 나온 경우 △경찰서장이 특별히 필요하다고 판단한 경우 등에서 민간경호를 실시하고 있다. 지원기간은 14일 이내로, 필요시 추가로 14일 연장이 가능하다. 피해자 1명당 경호원 2인을 배치해 근접경호를 하는 방식으로 비용은 전액 정부가 부담한다.

3개월 째 실시된 이 제도에 대한 피해자들의 만족도는 높았다. 경찰 설문조사 결과, 응답자 전원(21명)이 서비스에 만족했으며, 보복 위험으로부터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꼈다고 답했다. 경찰관과 경호원이 협력해 범인을 잡은 사례도 있었다. 전과 14범의 스토킹 가해자 60대 남성은 "피해자를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중 경찰 수사가 시작되자 잠적했다. 이후 경호원이 26일 간 피해자와 출퇴근을 함께하고 직장 주변을 순찰하는 동안, 경찰이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가해 남성을 검거하는 데 성공했다.

경호원 앞에선 꼼짝 못하는 스토커들

경찰이 민간과 협력을 시작한 이유는 제한된 경찰력으로 피해자를 24시간 밀착보호 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스토킹 피해자에 스마트워치를 지급하고 거주지 주변을 순찰하며 가해자에게 접근금지 등 처분을 내리고는 있지만, 피해자 바로 옆에서 경호를 하는 만큼의 효과를 내긴 어렵다.

스토킹 피해 경험이 있는 30대 여성 C씨는 "전 남자친구 스토킹에 시달리다 고민 끝에 경호업체를 찾아갔다"며 "상담을 통해 경호원이 사촌오빠 역할을 해줬는데, 물리력을 사용하지 않고 강한 어조로 주의만 줬을 뿐인데도 연락도 없고 집에 찾아오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대부분 스토커들에게 '건장한 조력자'의 등장은 큰 효과를 거둘 수 있다고 한다. 한 경호업체 대표는 "보통 스토킹 가해자는 피해 여성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그런데 자신보다 신체적으로 강한 경호원을 마주하면 통제력을 잃었다고 생각해 스토킹 사건이 일주일 내에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치안분야 민관 협력 모범사례로 평가

전문가들은 범죄 피해자를 보호하는 민간경호원 지원사업이 하이브리드 폴리싱(Hybrid Policing·경찰과 민간이 공조하는 치안활동)의 모범 사례가 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성용 계명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영국에서는 범죄자 호송 등 단순 업무는 경비업체가 담당하는 등 세계적으로도 민관 협력이 이상적인 치안모델로 평가 받는 추세"라며 "사회적 약자 보호를 위한 안전망 확대를 위해 경찰·민간·지방자치단체 등의 협업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찰 관계자는 "민간경호 지원사업은 경찰과 민간이 협업해 피해자를 보복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하는 사업"이라며 "현재 수도권에서의 시범운영 결과를 토대로 전국 확대 여부 등을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이승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