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제주도로 여름휴가를 떠나려던 직장인 안모(30)씨는 지난달 항공권을 알아보다가 마음을 접어야 했다. 성수기인 이른바 '7말 8초(7월 말에서 8월 초)'에 떠나려면 왕복 항공권만 약 30만 원이 들어서다. 작년 여름보다 2배 가까이 올랐다. 안씨는 "혼자 제주도 가는데 100만 원도 더 들 것 같다"며 "차라리 연말에 해외 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여름휴가는 포기했다"고 말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기간 억눌렸던 해외여행 빗장이 풀린 이후 첫 성수기인 올여름 '휴포족(휴가 포기족)'이 속출하고 있다. 온라인 설문조사업체 '피엠아이'가 지난달 초 전국 성인 3,0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여름휴가 계획이 있다"고 답한 이는 고작 27%에 불과했다. 반면 "계획이 없다"(36.8%) "아직 정하지 않았다"(36.2%)고 답한 이들은 73%에 달했다. 휴가계획을 세웠다가 직전에 취소한 이들도 적지 않다.
올해 유독 폭염과 폭우, 태풍 등 변덕스러운 날씨 영향이 컸다. 7월 말부터 장마가 시작됐고, 이어 태풍 '카눈'이 북상했다. 태풍이 지난 후인 이달 초부터 한낮 기온이 35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사회초년생 임모(26)씨는 "입사 뒤 첫 여름휴가라 기대가 컸는데 역대급 폭염에 여행 갈 생각이 눈 녹듯 사라졌다"면서 "연차는 아껴두고 주말을 틈타 강릉에서 짧은 휴식을 취하고 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직장인 정현욱(42)씨도 "전국 어딜 가든 덥고 사람만 많을 것 같아서 여름휴가를 미뤘다"며 "날이 선선해지면 편안하게 휴가를 갈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10세 아이의 방학에 맞춰 제주 여행을 준비하던 워킹맘 정모(40)씨는 "바다 보러 제주에 가려고 했는데 폭우에 태풍까지 겹쳤고, 너무 더워서 여행을 취소했다"며 "아이 방학이 아쉽지만 가서 고생하느니, 다음을 기약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이달 초 태풍 북상으로 "예약한 일본 오키나와행 비행기가 태풍으로 결항돼 왕복 항공료 80만 원을 손해봤다"고 한탄하는 글도 올라왔다.
고물가도 '7말 8초' 휴가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성수기 항공료와 숙박료 등이 큰 폭으로 뛰는 '베케플레이션(Vacation+Inflation·휴가비 인상)'으로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통계청이 2일 발표한 '소비자물가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휴양시설 이용료는 전년 같은 기간보다 17.2%, 호텔 숙박료는 6.9% 올랐다. 이 밖에 외식 물가 5.9%, 놀이시설 이용료 5.7% 등도 대폭 뛰었다.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4인 가족 2박 3일 국내 여행에 150만 원 가까이 들었다" "친구 셋과 경기도 가평 풀빌라 가려고 했더니 숙박비만 1박에 50만 원이 넘어서 그냥 포기했다" "4박 5일 휴가 가려고 보니 숙박비만 200만 원, 비수기 때 10만 원대인 호텔은 40만 원. 휴가 가기 겁난다" 등 휴양지 고물가를 호소하는 댓글이 수두룩하다. 실제 제주와 강원 등 국내 대표 휴양지 숙소 가격은 1박당 5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인원 수가 늘어나면 추가 요금이 발생해 가격은 더 높이 뛴다.
숙박비뿐 아니라 외식비 등 부대비용도 고공행진이다. 강원 유명 휴양지 인근의 한 음식점은 수육 한 접시(소)가 1만5,000원에서 최근 2만 원으로 올랐다. 제주 한 유명 음식점은 갈치조림 가격을 지난해 7만 원에서 올해 8만 원으로 인상했다. 제주 유명 음식인 흑돼지고기도 1인분에 3만 원 안팎으로 판매된다. 제주에서 일본으로 여행지를 바꾼 주부 김경아(35)씨는 "제주도가 숙박이나 항공은 해외보다 저렴하지만 외식비나 체험비 등을 생각하면 돈을 좀 더 내고 일본을 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고 전했다. 제주나 강원에서 바나나보트, 제트스키 등 해양 스포츠 체험 비용도 13만~19만 원에 달한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가 6월 여론조사업체 '엠브레인퍼블릭'에 의뢰해 직장인 1,000명을 대상으로 설문한 결과, 올해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지 못한 응답자(561명) 중 61.9%(347명)는 "휴가를 갈 경제적 여유가 없다"고 답했다.
폭염과 고물가에 '홈캉스'도 다시 인기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차라리 어디 놀러 갈 돈으로 집에서 에어컨 틀고 배달 음식 시켜 먹는 게 진정한 휴가 아니냐" "더운데 그냥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는 게 최고의 휴가다" 등의 글이 속속 올라왔다. 인스타그램 등에는 집 베란다에서 풀장을 설치해 물놀이를 하거나, 홈베이킹과 촉감놀이 등 아이들이 실내에서 즐기는 활동을 공유하는 부모들도 많다.
여름휴가 대신 '늦캉스(늦은 휴가)'를 가는 이들도 늘어났다. 이들은 성수기를 피해 9~10월에 휴가를 떠난다. 제주 왕복 항공권은 이달 1인당 30만 원을 넘지만 10월이면 반값으로 뚝 떨어진다. 숙박료도 비성수기가 성수기보다 30~50%가량 더 저렴하다. 이달 말 강원도 평창으로 가족 여행을 가는 직장인 이모(32)씨는 "남들이 쉬고 돌아올 때 떠나서 푹 쉬고 올 예정"이라며 "이상 기후로 여름휴가가 무색해진 게 아닌가 싶다"고 했다.
여행업체 하나투어에 따르면 여름휴가철인 지난달 말보다 징검다리 연휴인 9월 말 추석 연휴와 10월 개천절 기간(9월 28일~10월 3일) 여행 상품 예약률이 약 20% 높았다. 여행업계 관계자는 "폭염과 고물가에 '7말 8초' 휴가를 가는 이들보다 징검다리 연휴인 '9말 10초' 휴가자들이 많다"며 "특히 9월에는 날씨가 좋기 때문에 장거리 여행지인 유럽을 찾는 이들이 동남아보다 더 많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