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3월 17일 아프리카 우간다 서쪽에 위치한 조용한 시골 마을 카눈구. 이날 아침, 언덕 위에 자리 잡은 교회에서 시뻘건 불이 타올랐다. 연기를 보고 놀란 주민들이 달려왔으나 이내 겁에 질렸다. 불길에 휩싸인 안쪽으로부터 수많은 이의 찢어지는 비명이 쏟아져 나왔다. 노릿한 악취가 코끝을 스쳤다. 굳게 닫힌 문은 두드리는 손들로 절박하게 덜컹거리기만 했을 뿐 열리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모든 소리가 뚝 끊기고 건물을 집어삼킨 화마(火魔)의 기척만이 남았다. 그들은 ‘심판’을 내린 권능자가 신이 아님을 모른 채 죽었다.
교회를 생지옥으로 만든 불이 꺼지자 으스스한 진실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건물 안에 있던 사망자들은 컬트(사이비 종교) 집단 ‘십계명회복운동’ 신도들이었다. 이날 세상이 끝날 것으로 믿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건 아니다. 누군가 건물 문과 창문을 틀어막고 불을 질러 수백 명이 불에 타 죽었고, 교단 사유지에서도 살해된 신도들 시신이 발굴됐다. ‘종말의 날’, 신의 심판은 없었고, 가짜 예언을 믿었던 900여 명만 목숨을 잃었다.
‘십계명회복운동’은 미션스쿨 교사였던 ‘조셉 키브티레’와 매춘부 ‘크레도니아 므베린데’가 1989년 창설한 로마 가톨릭계 이단이었다. 교주 키브티레는 “성모로부터 ‘세상이 곧 끝난다’는 계시를 받은 뒤 10년간 소통하고 있다”고 설파했다. 구원받을 방법은 ‘타락한 현세에 떠 있는 노아의 방주’인 교단의 지시에 따라 십계명을 지키는 것뿐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그 내용은 매우 극단적인 겁박이었다. 예컨대 “네 이웃에 대해 거짓을 고하지 말라”는 아홉 번째 계명을 어길 위험이 있다면서 소리 내 말하는 행위 자체를 금하고, 수화로만 소통하게 하는 식이었다. 교단은 신도들에게 수행을 이유로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엔 식사를 한 끼만 먹도록 했다. 성관계와 비누로 몸을 씻는 행위, 항생제 복용도 금지했다.
십계명회복운동 신도들은 크레도니아 수녀의 부친의 연고지인 카눈구 마을에 자리 잡고 단체 생활을 했다. 농장 부지를 사서 신도들이 농사를 지으며 생계를 이어가도록 했다. 그러면서 교회와 학교를 세워 어른과 아이를 가리지 않고 세뇌했다. 파면된 사제와 수녀를 끌어들인 뒤, 마치 정론인 척 설교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동시에 종말을 맞을 준비를 했다. 어느 날 교주는 “신이 1999년 12월 31일을 심판의 날로 지목했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신도들에게 새로운 천년이 시작되기 전 모든 재산을 처분해 그 돈을 ‘노아의 방주’, 즉 교단에 환원하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종말의 날 당일은 물론, 2000년 1월 1일에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신도들 눈빛에선 믿음이 사라졌다. 교단에 바친 재산을 돌려 달라고 떼로 몰려가 항의하거나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이 대거 발생했다. 헌금은 교단 운영이 어려워질 정도로 줄었다.
종말의 날이 ‘2000년 3월 17일’로 새롭게 정해졌다. 교주는 “성모 마리아에 의해 세계 종말의 기한이 연장됐다. 더 나은 세상의 시작을 준비하기 위해 그날 교회로 다시 한번 모이자”면서 남은 신도들을 달랬다. 당일 교회에 도착한 신도들은 황소를 도축하고, 그 고기를 먹으며 종말을 기다렸다. 교주 키브티레와 크레도니아 수녀 등 교단 지도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굉음과 함께 교회는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였다.
건물은 전소됐고 살아 나온 이는 없었다. 사망자 대부분이 벽, 창문, 문 앞에서 발견됐다. 시신들은 심각하게 그을린 상태였다. 교회에는 530여 명이 모여 있었던 것으로 겨우 ‘추정’됐다. 카눈구 마을의 한 주민은 “마을 전체가 연기와 그을음, 악취로 뒤덮였다. 많은 주민이 외출할 때 민트를 씹고, 몇 달째 고기를 먹지 못하고 있다”고 당시 처참했던 상황을 전했다.
대형 참사에 우간다 경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곧 종말을 맞는다는 교주 전언이 있었고, 이에 교단이 다음 생을 준비하고 있었던 사실이 밝혀졌다. 수백 명의 사망자를 낳은 화재는 그렇게 ‘컬트 집단의 집단 자살’ 사건으로 마무리되는 듯했다.
그러나 의심스러운 정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날 아침 교회 근처에서 못과 망치를 들고 가던 한 신도를 봤다는 목격자 증언이 나왔다. 화재 당시 문과 창문이 판자로 막혀 있어 희생자들은 불타는 건물 밖으로 탈출하지 못했다. 게다가 발화 지점은 교회 건물 외부로 추정됐다. 경찰은 누군가가 교회 건물 안의 수백 명을 철저히 가둔 뒤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고 판단했다.
나흘 뒤, 카눈구로부터 48㎞ 떨어진 교단 소유 건물을 수색하던 경찰은 폐가의 흙바닥이 움푹 패 있는 것을 발견했다. 삽으로 내려치자 바닥이 무너져 내리며 구덩이가 드러났다. 신도 수백 명의 주검이 추가로 발견됐다.
새로 발견된 시신은 총 153구로, 성인 94명에 어린이 59명이었다. 사인은 다양했다. 목이 졸리거나 날카로운 흉기에 찔렸고, 일부에서는 독약이 검출되기도 했다. 아슈만 무게니 경찰 대변인은 “시신들은 한 달 동안 흙바닥에 묻혀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교회 화재 다음 날 누군가 버려진 집에 불을 지른 정황이 있다”고 밝혔다.
끝이 아니었다.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교단 소유 영지마다 ‘고문실’로 쓰였던 구덩이들이 발견됐고, 암매장된 시신들이 더 나왔다. 라구지 지역 영지의 구덩이에서 155구, 다른 농장에서 81구가 각각 발굴됐다. 전소된 교회의 재래식 변소에선 황산을 뒤집어써 온몸이 절단돼 있는 시신 6구도 나왔다. 두 번째 ‘종말의 날’까지 900여 명이 몇 주에 걸쳐 조용히 살해된 것이다.
우간다 경찰은 이 사건 성격을 집단자살에서 ‘지도부에 의한 대량학살’로 전환했다. 유력한 동기는 돈이었다. 가짜 예언에 실망해 그간 바친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한 이들이 살해 대상이 됐다. 불이 나기 전 교회를 빠져나가 유일하게 목숨을 건진 한 10대 생존자는 미국 뉴욕타임스에 “2000년 1월 1일 이후 많은 신도가 지도부에게 복잡한 질문을 던졌다. 세상이 끝난다고 해서 전 재산을 팔았는데 이제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 추궁했다”고 전했다. 이어 “그 신도들은 얼마 못 가 사라지곤 했다”며 “세상 마지막 날 행사에서도 집단자살 계획을 전달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거기까지였다. 유력 용의자였던 종교 설립자들이 자취를 감춘 탓에 범행 경위를 더 자세히 파악할 길이 없었다. 화재 당일 새벽 누가 교회의 창과 문에 못질을 했는지도, 누가 시신을 숨긴 폐가를 불태웠는지도 규명되지 않았다.
요웨리 무세비니 우간다 대통령까지 나서 “금전적 이익을 좇던 사제들의 대량 살인”이라며 엄정한 수사를 명령했지만 진전은 없었다. 시신 수색은 중단됐고, 대량학살 혐의로 기소된 이도 없었다. 수사 당국은 키브티레와 크레도니아가 해외 도주를 했다고 보고 국제 수배령을 내렸으나 2014년 키브티레가 아프리카 동남부 국가인 말라위에 숨어 산다는 정보가 마지막이었다. 지금까지도 그들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아프리카에서 컬트는 드물지 않고, 극단적 사건도 빈번히 발생한다. 올해 4월 케냐에서도 ‘기쁜소식국제교회’ 교주가 신도 400여 명을 강제로 굶어 죽게 만들고, 시신을 유기한 혐의로 체포됐다.
이러한 착취의 씨앗은 정부와 정통 기독교에 대한 좌절감이다. 아프리카의 컬트는 △빈곤과 가뭄 △전염병 등과 같은 지역 문제를 친숙하게 다루면서 소속감을 안겨 주는 수법으로, 부패한 정부 및 오랜 내전으로 황폐해진 아프리카인들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다고 BBC는 분석했다. 우간다가 혼란을 겪었던 1990년대 후반, 십계명회복운동 신도는 약 6,000명에 달했다. 한 신자는 컬트가 앞세운 허무맹랑한 종말론을 믿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라는 가난, 폭력, 에이즈로 초토화됐고, 손을 내밀어야 할 정부와 종교는 타락했다. 종말 직전과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