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설 56주년 맞은 아세안...'미중 갈등' 휘말려 구심력 흔들릴 위험" [인터뷰]

입력
2023.08.08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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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앤 린 동남아연구소 수석연구원 인터뷰
미중 갈등·복잡한 국제정세, 아세안에 부담

연평균 경제성장률 5%대, 인구 6억7,000만 명, 국내총생산(GDP) 3조3,646억 달러(세계 6위)에 달하는 거대 단일 시장.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을 수식하는 표현이다.

56년 전인 1967년 8월 8일 창설된 아세안은 ‘다양성 속의 조화’라는 기치 아래 분쟁, 반목, 저개발에 시달리던 동남아를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으로 성장하는 지역으로 탈바꿈시켰다. 세계 각국은 앞다퉈 아세안에 손을 뻗었고 한국 역시 지난해 한·아세안연대구상(KASI)을 내놓으며 협력 강화를 모색하고 있다.

아세안이 직면한 과제도 많다. 동남아가 세계 외교·안보 각축장이 되면서 구심력이 약해지고 미얀마 군부 쿠데타를 비롯한 역내 이슈에 한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다. 싱가포르 싱크탱크인 동남아시아연구소(ISEAS) 조앤 린 아세안연구센터 수석연구원은 1일 한국일보와의 서면인터뷰에서 “아세안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역내 긴장을 끌어올리면서 '아세안 중심성(ASEAN Centrality)'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지정학적 격랑 속 뚜렷한 분열

‘아세안 중심성’은 아세안이 지키려하는 핵심 가치다. 외부 강대국의 힘에 휩쓸리지 않고, 직접 운전석에 앉아 지역 발전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인종, 종교, 국토 규모, 소득 수준, 정치 시스템 등이 모두 다른 회원국 10개국을 56년간 하나로 묶어 온 원동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세안 중심성을 지키기가 어려워지고 있다는 게 린 연구원의 분석이다. 미국과 중국이 서로의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동남아에서 경쟁하면서 아세안이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 때문이다. 그는 “강대국의 경쟁으로 아세안 내 중립 공간이 줄고 있다”며 “말레이시아 등은 중국을, 필리핀 등은 미국을 선택하는 등 이해 상충이 빈번해졌다”고 설명했다.

올해 초 ISEAS가 아세안 회원국 사회 지도층 1,308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응답자의 60.7%는 “아세안이 점점 더 분열되고 있다”고 답했다. 1년 전 조사(48.2%)보다 10%포인트 넘게 늘었다.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쿼드(Quad·미국, 인도, 호주, 일본)’, ‘오커스(AUKUS·미국, 영국, 호주)’ 등의 소규모 다자 네트워크가 부상하는 점,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같은 국제사회의 갈등 상황이 이어지는 점도 아세안에 부담이 되고 있다고 린 연구원은 설명했다. 국제 정세가 복잡해질수록 아세안이 한목소리를 내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올해 아세안 의장국인 인도네시아의 조코 위도도 대통령이 “강대국의 대리인이 되지 않겠다”고 천명했지만 선언에 그치는 상황이다.

”보다 유연하게 접근해야”

2년 넘게 이어진 미얀마 사태는 아세안 중심성을 흔드는 내부 요인이다. 돈 쁘라뭇위나이 태국 외무장관이 지난달 아웅산 수치 미얀마 국가고문과 따로 만난 사실이 최근 뒤늦게 확인되자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등이 비판한 것은 단적인 사례다.

린 연구원은 “인도네시아는 미얀마 군부가 미얀마 사태 해결을 위한 ‘5대 합의안’을 따를 수 있도록 회원국들이 한목소리로 압박해야 한다는 입장”이라며 “태국의 개별 행동은 아세안의 노력을 무력화하고 블록을 분열시키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린 연구원은 아세안 역내 상황과 세계 정세가 점점 복잡해지면서 '아세안 중심성'을 유지하기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아세안이 급격한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유연한 접근 방식을 택해야 한다”며 “남중국해 문제 등 유사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국가 사이 소규모 그룹을 만들어 의견을 공유하고 시기가 무르익으면 그룹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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