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신림역과 경기 성남시 서현역에서 흉기 난동 사건이 잇달아 발생하면서 공포가 커지고 있다. 불특정 다수를 노린 이른바 '묻지마 칼부림'은 일본을 떠올리게 한다. 1990년대 이후 '잃어버린 30년'이라 불리는 장기 경제침체를 겪은 일본에선 2000년대 들어 20, 30대 남성에 의한 무차별 살상 범죄가 기승을 부렸다.
2008년 20대 남성이 트럭을 몰고 도쿄 아키하바라 상점가로 돌진해 행인들을 치고 흉기를 휘둘러 7명이 사망하고 10명이 중경상을 입은 '아키하바라 사건'이 대표적이다. 2001년 이케다 초등학교 사건(8명 사망·15명 부상), 2016년 사가미하라 장애인 시설 사건(19명 사망·26명 부상) 등도 피해 규모가 컸다. 2021년 도쿄 전철 안에서 칼부림과 방화 사건이 연달아 발생하는 등 최근까지도 유사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일보는 일본의 저명한 범죄심리학자 2명에게 한국의 이번 사건이 일본과 유사한지, 그렇다면 원인과 근본 방지책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기류 마사유키 도요대 교수와 고미야 노부오 릿쇼대 교수가 4일과 5일 각각 전화와 화상 인터뷰에 응했다. 기류 교수는 일본 과학수사연구소 소속 프로파일러로 20년간 근무했다. 고미야 교수는 유엔 아시아극동범죄방지연구소, 법무성 법무종합연구소 등을 거쳤다.
이들은 "신림역 사건은 일본의 무차별 살상 범죄와 매우 유사하다"며 △행인이 많아 많은 피해를 발생시킬 수 있는 역 주변을 범행 장소로 삼았고 △가해자가 사회적 콤플렉스에 시달린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공통점으로 꼽았다. 이어 "두 사건을 시작으로 유사 범죄가 더 발생하지 않게 하려면 한국 정부가 일본의 과거 사건들을 자세히 연구해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본 법무성이 2000~2010년 무차별 살상 사건으로 수감된 52명을 조사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39세 이하가 조사 대상자의 70% 이상을 차지했다. 대부분이 남성이었으며, 80%가 무직이었다. 친구가 없는 경우가 많았고, 정신병력자는 거의 없었다. 학력은 중졸(63%)이 다수였다.
이들은 범행 동기로 실직, 실연 등을 꼽았지만, 기류 교수는 "그런 이유는 어디까지나 범행을 현실로 옮기는 계기가 된 방아쇠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자존심은 강한데 아무도 자신을 인정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데 불만을 품고 '내 존재를 드러내 증명하고 싶다'는 것이 무차별 살상범들의 공통적인 내적 동기"라고 설명했다. 이 때문에 가해자들은 범행 후 언론이 자신을 어떻게 보도하는지를 알고 싶어 한다고 한다.
고미야 교수는 '세상이 나한테만 불공평하다는 느낌'이 사회·경제적으로 뒤처진 남성들의 범행 동기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짚었다. 소셜미디어를 통한 비교가 좌절감을 부추기고, "세상이 불평등한 건 사회와 타인들 때문"이라고 탓하는 온라인 공간의 문화가 비뚤어진 분노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고미야 교수는 "빈곤과 고립에 처한 사람들이 모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건 아니다"라며 "나만 그런 어려움을 부당하게 겪는다는 불만이 무차별 살상 범행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런 왜곡된 인식은 '나는 못 누리는 행복의 상징'을 찾아 붕괴시키는 행동으로 이어진다. 고미야 교수는 "사람들이 모여서 쇼핑을 하는 주말의 아키하바라도 행복의 상징으로 선택된 것"이라며 "2021년 핼러윈 때 조커 복장을 하고 도쿄 게이오선 전철에 탑승해 흉기 난동을 벌인 가해자도 핼러윈을 즐기는 사람들의 행복을 노렸다"고 말했다. 그는 "남성들만 골라 흉기를 휘두른 신림역 가해자도 '나보다 키가 큰 남자들'을 행복의 상징으로 선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키가 163cm로 알려진 신림역 가해자는 "키가 작아 열등감을 느꼈다"고 진술했다.
기류 교수는 한국 정부가 일본에서 일어난 무차별 살상 범죄를 자세히 연구하고 유사 범죄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장소들을 특정해 경비를 강화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는 "일본에선 초기에 지하철역 인근 등이 타깃이 됐다가 해당 지역의 경비가 강화되자 초등학교, 쇼핑몰, 전철 안 등 더 취약한 곳으로 옮겨 갔다"고 말했다. 교토 애니메이션 방화사건(2019년)과 오사카 기타신치 빌딩 방화사건(2021년) 등의 경우처럼 경비가 허술한 건물에 불을 질러 수십 명을 살해하는 등 범행 수법이 진화한 것도 눈여겨보라고 조언했다.
자원봉사자들로 구성된 지역 순찰대를 꾸리는 것도 당장의 치안 대책으로 꼽혔다. 이성을 잃은 가해자들은 방범카메라는 두려워하지 않는 반면 순찰대 앞에선 주저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기류 교수는 일본에서 2002년 고령층 자원봉사자 등을 활용한 '지역방범패트롤 제도'가 도입된 후 범죄율이 크게 낮아졌다고 밝혔다. 또 무차별 살상 범행에 대비해 출퇴근하는 길이나 자주 가는 장소의 대피 경로를 미리 잘 알아두라는 조언도 덧붙였다.
기류 교수와 고미야 교수는 경비 강화는 한계가 뚜렷한 만큼 예방을 위한 사회적 차원의 근본 대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범죄의 토양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위에 제시한 법무성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한 달 수입이 0원(31명)인 사람이 가장 많았고, 10만 엔(92만 원) 이하가 9명, 20만 엔 이하가 8명이었다. 배우자나 파트너가 있는 사람은 1명도 없었고, 교제 상대가 있는 사람은 1명, 친한 친구가 있는 사람은 3명뿐이었다.
고미야 교수는 "빈곤하고 고립된 청년들에게 기본소득 등 재정 지원을 하거나 직업 교육을 강화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기류 교수는 좌절한 청년들을 위한 접근성 좋은 상담 창구를 만드는 방안을 제시했다. 일본 정부는 2021년 정부 기구인 '고독·고립 문제 대책실'을 설치해 일정 부분 효과를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