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대학생 43명이 감쪽같이 사라진 2014년 9월 26일. 칠흑 같이 어두웠던 그날 밤,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약 190㎞ 떨어진 게레로주(州)의 도시 이괄라로 향하는 버스 여러 대에 나누어 탄 100여 명의 아요치나파 사범대학교 학생들은 그저 들뜬 상태였다. 농촌 지역 교사 임용에 대한 차별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석하려던 대학생들은 버스 안에서 노래를 부르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잠에 곯아떨어진 이들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버스가 멈췄고, 총성이 울렸다. ‘라틴아메리카 현대사의 최대 비극’(인권단체 휴먼라이츠워치) 중 하나로 평가받는 아요치나파 학살 사건의 시작이었다. 생존자들 증언에 따르면, 예상치 못했던 총격에 현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심지어 학생들에게 총구를 겨눈 건 바로 무장한 경찰이었다.
“경찰관님. 쏘지 마세요. 우리는 그냥 학생들이에요. 친구가 총에 맞았어요. 구급차를 불러주세요.” 거듭된 호소는 소용이 없었다. 20분이 넘도록 무자비한 폭력이 계속됐다. 학살의 밤, 6명(시민 포함)이 죽었고, 57명의 학생이 사라졌다. 총알 세례로 벌집이 된 버스만 남긴 채.
실종 대학생들과 같은 학교에 다니던 오마르 가르시아는 사건 당일 친구들로부터 “경찰이 우리를 쐈다”는 전화를 받고 이괄라로 급히 출발했다. 현지에 도착한 그는 일부 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경찰관들이 데리고 갔다”는 이야기에 안도했다. 경찰서에 있다면 석방을 요구하거나, 보석금을 내면 되는 일이었다.
다음 날 동이 트고 나서야 총격보다 더 큰 공포가 엄습했다. 이괄라 지역의 검사는 “어디에서도 (사라진 대학생들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가해자가 경찰이었기에 공권력도 믿을 수 없었다. 가족들은 수색대를 꾸려 직접 찾아 나섰다. 실종 학생들 중 14명이 귀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앙헬 아기레 당시 게레로 주지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세요.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오고 있어요. 무서워서 숨어 있으니 곧 돌아올 겁니다.”
그러나 주지사의 공언과 달리, 실종 9년 만인 2023년까지도 나머지 43명의 대학생은 돌아오지 않았다. 실종 원인은 물론, 시신조차 발견되지 않아 생존 여부도 불투명한 상황이다. 가족들은 멕시코 정부가 연루된 ‘국가 범죄’ 가능성을 의심하면서 제대로 된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
멕시코 검찰은 사건 발생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지역 마약 갱단 ‘게레로스 우니도스’가 경찰로부터 실종 대학생들을 넘겨받은 뒤 모두 살해했고, 시신은 모두 코쿨라 쓰레기 소각장에서 불태워졌다는 것. 배후로는 호세 아비르카 당시 이괄라 시장과 부인 마리아 앙헬레스가 지목됐다. 마리아의 정치 행사에 방해가 될 학생들을 공격하라고 아비르카 시장 측이 경찰에 지시했다는 내용이었다.
타이어와 나무 등을 쌓아 자정부터 새벽 3시까지 시신을 태웠고, 불에 탄 유골은 쓰레기 봉투에 넣어 가방에 담은 뒤 강물 속으로 던졌다는 갱단 소속 용의자의 증언도 공개됐다. 헤수스 모리요 당시 멕시코 법무장관은 “(범행에 가담한) 경찰관과 실제 가해자의 자백 등을 통해 학생들을 납치한 후 살해하고, 불태운 후 강에 버렸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사건은 국가에 의한 범죄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검찰 수사 결과에 대한 반발은 거셌다. 실종 대학생의 가족들은 “정부가 제대로 된 증거도 없이 사건을 마무리하려고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국제앰네스티도 “멕시코 정부와 범죄조직 간의 뿌리 깊은 유착을 다루지 않았고, 정부의 공모 의혹도 전혀 해명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멕시코 전역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항의 시위가 이어졌다.
그렇게 1년의 시간이 흘러갔다. 실종자 가족의 요구로 꾸려진 미주인권위원회 산하 독립전문가위원회(GIEI)는 2015년 9월 발표한 첫 보고서에서 “8개국 전문가 등의 조사 결과, 멕시코 당국의 발표는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며 재수사를 촉구하고 나섰다.
보고서에 기재된 최대 의문점은 ‘시신 43구를 모두 불태웠다’는 대목이었다. 뼛조각조차 찾기 어려울 정도로 완전히 태운 탓에 유골이 든 가방에선 실종자 43명 중 딱 한 명의 유전자만 검출된 상태였다. 당시 용의자들은 “시신에 타이어와 장작을 쌓은 후 휘발유를 뿌려 2~3시간 동안 태웠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독립전문가위원회에서는 “시신 43구를 유전자 검출이 되지 않을 수준까지 소각하려면 30만 톤의 나무로 60시간 동안 태워야 한다”고 지적했다.
범행 동기나 사건 경위가 정확히 설명되지 않는 점도 문제로 꼽혔다. 실종된 학생들은 이괄라 시장 부인의 행사 이후에야 이괄라시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게다가 위원회 발표 한 달 전, 실종자를 직접 찾아 나섰던 운동가 미겔 앙헬 히메네스가 총에 맞아 숨지면서 의혹은 더 커져만 갔다.
사건 발생 4년 후인 2018년, 멕시코 정권이 무려 89년 만에 바뀌고 나서야 아요치나파 학살 사건 재조사는 급물살을 탔다. 이 사건에 대한 반감이 정권 교체의 동력이 된 터라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MLO·암로) 대통령은 당선되자마자 진상규명위원회 구성을 지시했다. 2015년 꾸려졌던 GIEI 위원들도 다시 불러들였다. 암로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을 초청한 자리에서 “이건 국가 차원의 문제”라며 책임자 처벌을 거듭 약속했다.
“이 사건은 국가적 범죄이자, 갱단과 멕시코 국가기관의 합작입니다.” 지난해 8월 진상규명위원회를 이끄는 알레한드로 엔시나스 인권차관이 이렇게 말하면서 비로소 감춰진 진실이 드러나는 듯했다. 엔시나스 차관은 “실종자 중 6명은 생존한 채 갇혀 있다가 육군 지휘관의 명령에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면서 “군에 사건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결론도 내렸다. 사건 당시 피해 학생들이 다니던 대학에 군인 한 명이 침투해 있었고, 그 군인이 학생들과 함께 납치돼 실시간으로 상황을 군에 보고했는데도 당국에서 외면했다는 것이다.
멕시코 당국은 무리요 전 법무장관을 포함, 이 사건에 연루된 83명에 대해 조직범죄, 고문 등 혐의로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대상은 군인 20명, 지방정부 관계자 5명, 지방 경찰관 33명, 연방 경찰관 11명, 마약 갱단 조직원 14명 등이었다. 부패한 지역 정치인과 지방 경찰의 단순한 공모가 아니라, 정부와 군까지 광범위하게 얽힌 범죄라는 얘기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1심 법원은 살인미수 등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에게 줄줄이 무죄를 선고했다.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였다. 앞서 붙잡혔던 지역 마약 갱단(게레로스 우니도스)의 조직원도 고문 등으로 거짓 증언을 했다고 밝혀 풀려났다. 결국 43명이 한꺼번에 실종된 사건에서 법의 심판을 받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초래됐다.
멕시코에는 ‘지연된 정의’마저 끝내 찾아오지 않았다. 올해 7월 발표된 진실규명위원회 최종 보고서는 “실종자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한 결정적 판단이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다. 군이 증거를 숨기고 증언을 번복하면서 사건 조사를 방해한 탓이라는 게 위원회의 설명이다. 2015년 당시 5명이었던 위원들은 현재 2명으로 줄었고, 이들은 이제 멕시코를 떠나 영원히 돌아가지 않을 계획이라고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전했다.
암로 대통령의 태도도 바뀌었다. 취임 후 군과 적극적으로 손을 잡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최근 멕시코 국방부가 휴대폰 해킹용 스파이웨어로 실종자 가족의 변호인은 물론, 엔시나스 차관을 표적으로 삼았다는 언론 보도도 나왔다. 암로 대통령은 실종자 가족의 면담 요청도 거부하고 있다. 휴먼라이츠워치의 멕시코 담당 테일러 마티아스는 WP 인터뷰에서 “아요치나파를 위한 진실과 군대를 보호하는 것, 이 둘 중에서 암로 대통령은 후자를 선택했다”고 꼬집었다.
내년이면 43명의 대학생이 사라진 지 만 10년이 된다. 그간 공식 확인된 실종자 유해는 3구뿐이다. 그날의 진실은커녕, 나머지 40명의 생존 여부조차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산 채로 데려갔으니, 산 채로 데려오라”라는 실종자 가족의 절규만 응답 없이 메아리친다.